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클라인바드의 '부자증세로 불평등 해결하려 하지 말라'는 주장......

불평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은 크게 보면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시장소득의 분배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최저임금 정책, 노동조합 정책 등)과 정부의 세입정책 (조세의 누진도)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출정책 (사회보장, SOC의 수혜계층)이다.

이 중에서 뒤의 두가지를 묶어서 재정정책이라 할텐데, 과연 조제와 정부지출 중 어떤 것이 더 불평등을 공략하는데 유효할 것인가 하는 것은 흥미로운 문제이다. 지난 주 USC의 Edward D. KleinbardNew York Times에 미국의 경우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올려 불평등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Don't Soak the Rich)는 주장을 발표하였다. 간단히 살펴보자.

  • 미국의 세제는 선진국 기준으로 충분히 누진적(progressive)
  • 2013년 재정절벽(fiscla cliff) 논쟁에서 보듯, 학자들이 원하는 수준으로 고소득층 세율을 올리는 것은 아카데믹하게는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고
  • 오히려 재정지출을 통해서 불평등을 다스리는 게 바람직
  • 푸드스탬프나 메디케어 등 사회보장지출이야 타겟이 저소득층이니, 당연히 불평등완화 효과를 갖고
  • 인프라나 국방비 등의 투자도 CBO의 계산에 의하면, 수혜층은 폭넓게 공유하는 것으로 분포. 즉 평균노동자의 200배 소득을 올리는 CEO가 고속도로의 혜택을 200배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 OECD 피어그룹으로 보면, 미국은 평균이상의 누진적인 세제를 갖고 있지만, 지출측면의 소득불평등 효과가 낮은 문제
  • 예컨데 독일의 경우 세전 불평등은 비슷하고, 세제는 역진적이지만, 정부지출로 미국보다 높은 평등 구현

일부 공감하는 바도 있고, 한국과 미국의 차이도 있고 해서, 몇가지 논점을 평가해서 메모해 둔다.
  • 우선 나는 세입 측면보다 재정지출 측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대체로 공감한다. 
  • 다음으로 OCED 평균이라는 것이 뭐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한 준거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불평등 완화효과가 미국의 경우 세입은 평균이상, 재정지출은 평균이하이지만, 한국의 경우 세입과 재정지출 모두 평균 이하라는 점이 중요한 차이
  • 이것은 Isabelle Joumard, Mauro Pisu and Debbie Bloch (2013), "Tackling income inequality: The role of taxes and transfers", OECD Journal: Economic Studies, Vol. 2012/1에 등장하는 아래 표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따라서 한국의 경우 미국과 달리 세입과 재정지출 두가지 무기로 불평등과 싸울 필요 또는 여지가 있는 것으로 판단.
  • 클라인바드는 독일의 경우 세제의 불평등완화 효과가 미국보다 뚜렷이 낮은 것으로 주장하지만, 이것은 위 그림에서는 파악이 안된다. 이건 좀 더 살펴봐야.

클라인바드는 최근에 재정지출 개혁에 관한 단행본을 집필했는데, 이것도 흥미로울 듯: We Are Better Than This: How Government Should Spend Our Money (Oxford Univ. Press, 2014).

2014년 9월 9일 화요일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정치와 민주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논의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자유로운 시민들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 의사를 투표로 표출한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경제학에서 합리적인 경제인 (Homo Economicus) 가정에 대한 의문과 도전이 늘어나고 있는데, 정치학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밴더빌트의 정치학자 Larry Bartels는, 며칠전 WaPo의 Monkey Cage 블로그에서 스토니브룩 대학의 Cengiz Erisen 등이 수행한 sumbliminal prime 실험을 소개하면서 민주주의이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실험은 여럿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피실험자들은 자신에게 제시된 메시지를 읽고 의견을 밝힌다. 예컨데, 이런 메시지: “미국에 들어오고 있는 불법이민자의 수가 지난 6년간 급증하였다." 그리고 독립적인 실험조수가 이 반응이 긍정적이었는지, 부정적이었는지를 평가해서 기록한다. 당연히 피실험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영향을 미친다. 이민찬성론자들은 이민반대론자들에 비해서 긍정적인 반응이 38% 더 높았고, 부정적 반응이 34% 더 낮았다.

여기까지야 뭐 당연한 것인데, 이 실험은 숨겨진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메시지를 읽기 전에 아주 짧은 시간동안 화면에 다음과 같은 아이콘 중 하나를 '주제와 무관한 자극 (irrelevant stimuli)'으로 노출시켰다. 미소짖는, 찌푸린, 무표정한 얼굴. 효과는 매우 커서, 웃는 얼굴에 노출된 피실험자들은 찌푸린 얼굴에 노출된 피실험자들에 비해서, 부정적인 반응이 42% 낮았고, 긍정적인 반응이 160% 높았다.


Ersen 등은 노출시간이 0.039초로 극히 짧았기 때문에, 피실험자들은 자신이 이런 화면에 노출되었는지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자극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정치학보다는 마케팅이론에서는 널리 알려진 것으로 subliminal advertising이라고 부르는 광고기법이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음향이나, 영상을 삽입하여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는 것.

이 포스팅 이후에 컬럼비아의 정치학자 (아마도 황승식 교수 등은 통계학자로 분류하겠지만) Andrew Gelman은 이 효과가 너무 커서, 신뢰도에 의문을 표시했고, Bartels는 다시 추가로 답변하는 등 몇가지 설왕설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좀 더 진행될 듯하다. 아마도 원저자들이 나서지 않을까 싶은데.

나도 개인적으로 subliminal effect가 이렇게까지 클까라는 점에서는 의문을 갖고 있다. 내가 마케팅분야 전문가가 아니어서 조금 그렇지만, 상품 광고에서도 이렇게 효과가 분명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하지만 충분히 관심을 갖을 만한 주제로 생각하고, 좀 더 챙겨볼 계획이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방송광고심의에 관한 규정> 제15조(잠재의식광고의 제한)는 "방송광고는 시청자가 의식할 수 없는 음향이나 화면으로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방식을 사용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subliminal advertising의 방송광고를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방송광고는 <방송법> 제2조 제21호에서 '"방송광고"라 함은 광고를 목적으로 하는 방송내용물을 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어서, 방송을 통한 정치광고에 subliminal effect를 첨가하는 것이 불법인지는 조금 애매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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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4일 일요일

The Mythical Swing Voter

늘 그렇듯 앤드류 겔만의 주장은 흥미진진.

  • (문제의식) 미국은 정치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이 좀처럼 자신의 지지정당(후보)를 변경하지 않을텐데, 어떻게 대선 기간의 여론조사는 그렇게 진폭이 클까? 대규모 스윙 보터의 존재는 정치양극화와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 (확률표본과 poststratification) 여론조사는 응답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무작위추출을 해도 편이가 없는 확률표본을 구성할 수 없다. 그래서 사후적으로 가중치조정을 하게 되는데, 이때 주로 고려하는 것이 인구학적 요소들이다. 한국의 경우라면 연령/성별/지역이 대표적일 것.
  • (사례) 겔만 등은 2012년 미국 대선 마지막 45일 기간동안, 8만명 이상으로 구성된 패널을 대상으로 반복적으로 대선지지후보 조사를 수행. 
  • (스윙의 증거) 아래 그림은 지지자 없음 등은 제외하고 오바마지지나 롬니지지를 밝힌 유권자 중 오바마 지지율. 밴드는 95% 신뢰구간. 통상적인 인구학적 poststratification 처리후 결과. 

  • 가로 점선은 대선 오바마 득표율, 세로점선은 세차례에 걸친 대선후보 TV 토론일자로 상당히 큰 폭으로 아래위 출렁거렸고, TV 토론이 중요한 분수령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차트는 실제 당시의 각종 여론조사 결과와 유사한 모습.
  • (스윙의 반증) 위 그림에서 1차토론 전후 1주일동안 오바마 지지율은 10포인트 정도 급락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같은 기간 지지후보 변경비율을 추정해 보니, 극히 미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바마->롬니 변경은 0.5%를 갓 넘고, 롬니->오바마 변경은 0.2% 정도. 가로막대는 95% 신뢰구간.

  • 겔만 등은 TV 토론의 효과는 지지 후보를 교체한 것이 아니라, 토론에서 죽을 쓴 후보의 지지자들이 설문에 응답하지 않고, 반대로 활약을 한 후보의 지지자는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을 확인한 것이 아래 그림. 이를 확인 하기 위해, 인구학적 변수로 poststratification을 한 것 (흐린 부분) 외에, Party ID(당적? 지지정당?)을 추가적인 가중치로 해서 poststratification을 수행 (짙은 부분). 이렇게 Party ID를 추가적으로 고려하면, 실제 득표율로부터 변동이 매우 축소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도 몇가지 시사점이 있는 듯 한데,

  • 한국도 정치 양극화가 상당해서 단기간에 (캠페인 기간 중에) 토론 한번 잘한다고, 또는 특정 공약 발표한다고, 여야 지지후보를 바꾸는 경우 크지 않을 것이다.
  • 그렇다고 이걸 너무 집토끼/산토끼 구분으로 해서, 우리편(?) 지지자에게만 소구하는 강공으로 나가면 된다고 하는 건 또 너무 단순한 것 같다. 강공만으로 집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 유비에 비추어 보면 답답해지는 측면도 크다.
  • 우리나라 여론조사 기관들도 관심이 있을 듯한데, 당적을 갖는 인구의 비율도 낮고, 유권자 등록시 지지정당을 밝히는 제도도 없고 해서, 우리는 보다 정확한 예측을 하기 위한 추가적인 도구가 무엇인지 고민이 있어야 할 듯.

2014년 7월 31일 목요일

[독후감]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마이클 S. 최 지음 (허석재 옮김),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 게임이론으로 본 조정 
문제와 공유 지식>, 2014년 7월,
후마니타스 출판사.
얼마전 국역된 Michael Chwe (최석용)의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게임이론으로 본 조정 문제와 공유 지식 Rational Ritual: Culture, Coordination, and Common Knowledge>은 가벼운 마음으로 들었다가 내용이 너무도 무거워 당황한 책이었다. 두세 시간이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다 읽는데는 며칠 걸렸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다시한번 꼼꼼히 읽어보고 싶은 그런 매력적인 책인데, 우선 극히 주관적으로 내가 주목했거나, 내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한 바를 간단한 메모로 남긴다.

조정 Coordination

경제학자들에게 익숙한 네트워크 외부성에서 시작해 보자. 우리가 소비하는 재화 중 어떤 것들은 다른 이들이 얼마나 사용하는가에 따라 나의 만족도가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보통 많이 드는 예가 팩시밀리인데, 만약 세상에 아무도 팩스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내가 구매한 팩스의 가치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 친구가 팩스를 보유하고 있다면, 나는 그 친구와 문서를 주고 받을 가능성이 있으니 약간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고, 나아가 수 많은 사람들이 팩스를 보유하고 있다면 내가 보유한 팩스의 가치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건 너무 뻔한 것인데, 이것을 조정의 관점에서 보자. 충분히 팩스의 사용자 베이스가 클 때는 소비자가 기꺼이 팩스를 사겠지만, 최초의 소비자에게 어떻게 팩스를 사게 할 수 있을까? 그 최초의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팩스의 가치가 전혀 없는데. 그러니까 집단의 입장에서 보면 팩스의 구입이 합리적이지만, 개인의 입장에서는 다른 이들이 현재 팩스를 갖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그들이 팩스를 구입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면, 이 집단은 아무도 팩스를 사지 않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수 많은 소비자들의 '조정'이 필요한 상황.

이에 대해서 경영학에서의 해답은 여러가지가 있다. 예컨데 팩스제조업체는 상위주체와 복수 공급계약을 맺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예컨데 정부와 계약을 맺고 전국의 수많은 관공서에 동시에 공급하는 것. 이것은 수많은 공공기관 구매부서들이라는 복수 주체의 조정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상위의 계약자를 찾아서 해결하는 것. 공동구매도 유사한 메카니즘. 또는 초기의 구매자들에게 엄청난 할인을 해주거나, 심지어 무료로 제공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면 초기 구입자는 부담이 없거나, 적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구매할 것이라는 믿음이 적더라도, 그러니까 조정이 덜 되더라도, 부담이 적기 때문에 구매에 나설 수 있다. 뭐 이 유사한 여러 해법들이 있다.

공유 지식 Common Knowledge

최교수는 또 다른 해법으로, 광고에 주목한다. 통상 상품들의 광고는 "이 제품은 이러저러한 효능이 있어요"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런 재화는 "다른 수많은 사람도 이 광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그 광고 보는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포함한 다른 수많은 사람이 이 광고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라는 공지성(publicity)을 알려주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시 시청자수가 높은 수퍼볼과 같은 TV 프로그램의 광고는 엄청나게 비싼 광고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이러한 네트웍 재화(최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사회적 재화)가 몰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유지식의 관점이 경제 뿐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 등 여러 영역의 문제 해결에 요긴하다고 저자는 믿고 있다. 예컨데 시위에 참여할 때 아주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나 외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내가 잡힐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한국어 제목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는 상당히 좋은 번역어라는 생각이 든다.

또 공지성을 높일 수 있는 물리적 기제가 원형 구조물이다. 고대의 원형극장이나, 미국 몇몇 도시의 원형 시티홀 같은 것. 극장의 관객이나 위원회 멤버는 원형의 중앙에서 펼쳐지는  공연이나 연설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다른 관객 또는 위원들도 나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다른 멤버들에게 알리고....이런 것. 특히 흥미로운 것은 벤담의 판옵티콘에 대한 최교수의 해석이다. 중앙의 감시탑에서 원형으로 배치된 감옥의 각 셀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감시의 비용은 줄어들지만 (중앙집중성), 반대로 이 원형 구조는 원형극장과 동일한 포맷이기 때문에 많은 수감자들 사이의 조정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예컨데 중앙 감시탑의 감시자가 졸았다고 해보자. 수감자는 감시자가 졸고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셀의 수감자들도 감시자가 졸고 있다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수 있다. 탈옥을 모의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중앙의 감시자는 수감자를 바라볼 수 있지만, 반대로 수감자가 감시자를 바라볼 수 없도록 하는 불투명 유리의 설치가 필요하고 (비대칭성), 또한 수감자들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수 없도록 셀 사이의 간막이를 중앙을 향해 연장시켜야 한다 (분리성).

제사장 또는 정치가

이 책의 원제는 합리적 의례이다. 왕실의 행차, 혁명기의 페스티벌,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통한 의례적 실천 등은 모두 다수의 국민들에게 발화자의 메시지를 전달할 뿐 아니라, 다른 국민도 그 메시지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공지성을 높이려는 시도이다. 제사장의 역할에서 이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정치가도 동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정치가의 컨텐츠가 일차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나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을 행동에 나서게 하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팩시밀리 구매와 투표를 비교해보자. 나는 정치가 A후보가 좋아 보이는데, 만약 모든 유권자 중에서 나 혼자 A를 지지한다면 거의 어떤 의미도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투표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또 그렇다면 정치가 A는 자신의 매력을 유권자들에게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다른 유권자들도 자신의 매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까지 알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것들. 그런 점에서 정치가는 제사장.

이런 생각을 해봤는데, 매우 아쉽게도 이 책에는 경제와 문화에 대한 폭 넓은 사례들이 나오는데, 정치에 대해서는, 저자가 UCLA 정치학과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사례가 많지 않다.

그리고 기타......

내가 마이클 최를 저음 알게 된 것은, 작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게임 이론가 제인 오스틴 Jane Austen, Game Theorist>에 대한 서평을 보고서였다. 약간 끌리긴 했지만, 책을 구해서 읽지는 않았다. 이론의 사례를 문학이나 서사에서 찾는 것이 그 흥미로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너무 억지로 가져다 붙이는 느낌이 있어서였다. 예컨데  스티븐 브람스(Steven Brams)는 공정분할(Fair Division)에 대해 멋진 저작을 남긴 게임이론가이지만, 성경을 게임이론으로 해석하겠다는 시도였던 <성경의 게임: 게임이론과 히브리 성경 Biblical Games: Game Theory and the Hebrew Bible>은 별로였고, 또 제인 오스틴에 대한 행동경제학적 설명, 이런 논문도 본 적이 있는데 이것도 썩 와 닿지 않았었다. 이런저런 기억들 때문에 미뤄두었던 것인데, 마이클 최의 책이라면 읽고싶다는 생각이 확 든다. (누군가 번역하고 있겠지? 아마도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이 책 번역 매우 훌륭하다. 아주 사소한 오탈자 외에는 심각한 오역처럼 느껴지는 부분 없었고, 아주 어려운 내용임에도 그래도 잘 읽힌다. 역자후기에 의하면 마이클 최의 아내 이남희씨가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데, 시카고 대학 사회학 박사이고, 또 그때그때 필요하면 저자와 바로 대화했을테니, 그녀의 역할이 상당했을 것 같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역자의 실력과 성의가 기본이고.

그리고 왜 이렇게 읽기가 어려울까 생각해보니, 이 책은 게임이론에 대한 사전지식보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쉽지 않은 그런 책이다. 수시로 튀어나오는 미쉘 푸코, 레비 스트로스, 하버마스, 루소 등등은 무척 당황스럽더라는.

어쨋든 개인적으로는 내 현장인 정치의 영역에서 이 책의 내용을 더 곱씹어 보고 싶다. 그리고 강추!

2014년 6월 3일 화요일

Equality of Opportunity 연구와 조세정보접근 방법

연초에 나는 Raj Chetty가 이끄는 The Equality of Opportunity 팀의 세대간 계층이동성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면서, 데이터 측면의 특징으로 '조세정보'를 직접 사용한 것을 들었다. 구체적인 방법을 몰라서 궁금해 하던 차에, Science의 과학정책 에디터인 Jeffrey Mervis가 이에 대해 쓴 기사를 발견. 읽어보니 내가 일부 오해한 것도 있고, 추가적으로 알게된 것도 있고 해서 정리해 둔다.

우선 오해한 것. 나는 IRS가 소득세 정보 중 일부항목을 제거 또는 수정하여 신원 추적을 못하도록 한 후에 (소위 de-identification), 이를 연구자들에게 제공하고 연구자들은 이를 활용하여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게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이고, 어려운 과제로 생각했던 것인데 이게 완전 오해였다. IRS는 가계단위의 조세정보는 가공여부와 무관하게 전혀 연구자들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들.

사회보장번호. 미국의 경우 1978년부터 소득세신고서의 부양가족 항목에 사회보장번호를 적는 것을 의무화. 가공의 부양자를 적발하려는 것으로 실제 78년에 갑자기 부양가족수가 수백만명이 줄었다고. 내가 늘 주장하는 것이지만, 한국은 주민등록번호 천국이기 때문에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어마어마어마어마한 데이터가 있는 나라. 국세청자료에도 다 들어있고, 학교의 학적부에도, 수능시험 원서에도, 건강보험자료에도. 나는 언제고 이 모든 자료에 적절한 방식으로 억세스하게 하면 어마어마어마어마한 정책적 발전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프라이버시를 매우 중시하는, 그래서 주민등록번호를 적지 못하게 하자거나, 심지어 주민등록번호를 아예 없애버리자는 분들의 주장은 충분히 그 취지는 이해하지만 확 지지하게 되지는 않더라는.

IRS 외부 연구 지원. Chetty 등은 2011년 IRS 연구공모에 응해서 선정된 것. 그해에 총 51 프로젝트가 지원해서, 19 개가 선정되었고 최종적으로 16 개 연구가 수행. 우리나라 국세청도 이런 외부연구 프로젝트가 있는지 확인 필요. 실제 IRS도 외부연구에 무척 소극적이었는데, 프린스턴의 걸출한 경제학자 Alan Krueger가 재무부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부임하면서부터 활기를 띄게 되었다고.

기이한 또는 절묘한 방식. 이게 가장 눈에 띄는데, 1) 랜덤한 숫자들로 채워진 더미 데이터를 연구진에게 제공 2) 연구진은 이 더미를 이용해서 프로그램을 테스트 3) 최종 프로그램을 IRS에 제공 4) IRS가 프로그램을 돌리고 5) 결과물을 연구진에게 제공. 어찌보면 진짜 비효율적이고, 오류가 많을 듯한데, 어쨌든 민감한 데이터를 건드리는 일이니 이것이 유일한 해결책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이런 방식 검토 필요.

재현 또는 검증. 사실 이렇게 연구가 수행되다 보니, IRS의 별도 승인을 받지 않으면 이들 연구의 핵심 발견에 대해 검증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문제가 있다. 이건 뭐 그 자체로 또 해결하면 될 듯하고.

좌우간, 이래서 국세청과 조세재정연구원에 대한 푸시가 필요한데, 한국경제학회나 재정학회 등에서 좀 나서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 결과물이 어느 정파, 어느 계급에 직접적으로 유리불리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쨋든 나의 신조는 We can't do evidence-based policy without evidence 그리고 진실은 민중의 무기.

2014년 5월 28일 수요일

페이스북 한국 지방선거에 공식 “투표인증” 기능 도입

페이스북은 과거 미국과 인도 등 일부 선거에서 적용되었던, “투표인증(I'm a Voter)" 기능을 한국의 지방선거를 포함하여 전세계적으로 확대한다고 최근 발표하였다. 아직 한국에서의 인터페이스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과거 사례로 미루어 보면 한국의 사용자들은 선거일 당일 아래와 유사한 화면을 보게 될 것이다.

<확대된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림을 클릭  >
선거일이라는 것을 알리는 타이틀 아래, 그 시점까지 투표인증을 한 친구의 프로필 사진, 친구의 수 및 전체 투표인증인 수를 표시한다. 그리고 해당사용자에게 투표인증 버튼을 눌러 인증에 동참할 것을 유도한다.

대표적인 민주주의의 구성원리는 “다수에 의한 의사결정”이다. 정당이 선거과정에서 보다 좋은 정책을 만들려고 하는 것, 보다 훌륭한  정치인을 발굴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정책과 인물을 유권자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은 모두 다수의 지지를 받으려는 행동이다. 하지만 다수가 지지하는 것과 그 지지를 투표로 행사하는 것은 밸개의 일이다. 투표하지 않는 유권자의 의사가 반영될 통로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거운동의 또 한 축은 지지자들을 설득하여 투표하게끔 하는 것이다. 특히 선거일 당일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통상 “투표독려 (Get Out the Vote)"라고 불리운다.

하지만 실제 투표율을 높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투표는 소중한 행동입니다”와 같은 호소도, “우리 정책이 월등히 더 좋으니, 꼭 투표해주세요”와 같은 설득도 크게 효과적이지 않다. 정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가족이나 친구의 면대면 압력 (social pressure)이 유효하다. 이것을 투표의 전염성(contagious voting)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전염의 속도가 너무 낮다는 것이다. 사례에 따라 다르지만, 지인들의 면대면 투표독려의 효과는 대략 1~10%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면대면 투표독려는 매우 힘든 일이다. 한사람이 투표 당일 과연 몇 명에게 독려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면대면 독려활동에 나서겠는가? 그래서 투표독려 활동은 중요한 선거운동이지만 어렵고 효과가 낮아 적극적으로 활용되지는 않고 있다. 물론 불법적인 것을 포함하면 얘기가 다르다.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과거 독재시절 자동차를 동원해서 유권자들을 투표장까지 실어 날랐던 행위를 생각해 보라.

반면 정보통신의 발달은 투표독려 활동에 새 지평을 열었다. 필자는 2002년 대통령선거 당일 친구들로부터 투표하러 가야한다는 문자메시지를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받았다. 투표를 하지 않으면 큰 죄를 짖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도 친구들에게 독려해야 한다는 상당한 압력(?) 또는 희열(?) 뭐 그런 것을 느꼈었다. 그리고 최근의 총선과 대선에서는 투표장 앞에서 찍은 소위 인증샷이 대유행이었다. 이것은 휴대폰에 장착된 카메라와 사진전송 기능 덕이었다. 다만 그 효과는 다양한 설이 분분할 뿐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다행이도, 페이스북은 투표인증 기능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에 앞서, 2010년 미국 연방 상하원 선거에서 방대하고 치밀한 실험을 수행하였고, 그 결과를 <네이처 Nature>지에 발표한 바 있다. 이들은 6천만명 이상의 미국 페이스북 사용자들을 임의로 세 그룹으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 그룹(소셜정보그룹)의 페이스북 화면은 위에서 소개한 것과 동일한 내용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두 번째 그룹(단순정보그룹)의 화면에는 위의 내용 중에서 페이스 북 친구 중 누가 투표했는가에 대한 사진과 이름을 제외하고 전체 투표자 수만 알려주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통제그룹)의 화면에는 아예 선거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확대된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림을 클릭>

결과는 매우 흥미로운데, 우선 투표선언(투표인증 버튼의 클릭)으로 투표율 제고의 효과를 측정해 보면, 소셜정보그룹에 속한 사용자들이 단순정보그룹에 비해 2.08% 더 투표율이 높았다. 통제그룹의 사용자들에게는 투표인증 버튼 자체가 없었으므로 이 그룹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몇 명이 투표했는가에 관한 페이스북 정보에 비해, 나의 페이스북 친구들 중 누가 얼마나 투표했는가라는 사회적 정보에 접하게 되었을 때 상당한 효과가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이러한 투표선언이 늘어난 것이 실제 투표의 증가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실제 투표를 추적하였다. 미국의 경우 일부 주에서는, 연구목적일 경우 투표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자료를 통해 보니, 소셜정보그룹에 속한 사용자들이 단순정보그룹에 비해서도, 통제그룹에 비해서도 모두 실제 투표가 0.39% 더 높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투표인증 버튼을 누른 것의 상당 부분은 지인들의 사회적 압력에 대한 거짓 반응으로 과장된 측면이 있다 (2.08%가 아닌, 0.39% 투표율 제고). 두 번째 투표율 제고는 전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단순정보그룹과 통제그룹 사이에 차별 없음).

마지막으로 연구진은 한 단계 더 나아가, 페이스북 친구 중에서 가까운 친구와 소원한 친구의 투표율 제고 효과가 다른가라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페이스북 상에서의 상호활동(댓글쓰기, 좋아요 버튼 클릭, 태그 붙이기 등)의 빈도를 통해서 해당 사용자의 친구를 10개의 소그룹으로 나누었다 (가장 소원한 1소그룹에서부터 가장 친밀한 제10소그룹까지). 이들 소그룹별로 효과를 살펴본 결과는 1~7소그룹에 속한 친구들이 투표율을 높이는 효과는 거의 없고, 8소그룹에 속한 친구의 효과는 어느정도 있지만, 우연일 가능성을 기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9소그룹과 10소그룹 효과는 각각 0.172%, 0.224%로 뚜렷이 높았다.

요약하자면, 페이스북이 도입한 투표인증기능은 투표율을 분명히 높인다. 2010년 미국실험과 시뮬레이션의 결론은 순수히 페이스북 효과만으로 34만명 이상이 추가적으로 더 투표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 작동방식은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친구들을 통해서, 특히 가까운 친구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비록 투표율 제고의 효과가 높아 보이지 않겠지만, 페이스북이 초대규모 네트웍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투표인증 버튼을 클릭하는 독려활동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최근의 선거들이 대부분 박빙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페이스북의 공인 투표인증 기능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광주의 트라우마는 멀리 흐른다.....

심리적 외상으로 번역되는 트라우마는 인간이 전쟁, 기근, 천재지변 등 외부의 충격이 너무 커서 정신적 장애와 그에 수반되는 육체적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지칭하는 심리학적 용어인데, 이런 특이한 단어가 일상어가 되어 버렸다. 위험사회로 불리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트라우마에 대한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육체적,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얼마나 지속되는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 경제학부의 이철희 교수의 광주항쟁시기 양민학살이 광주의 임산부들에게 초래한 트라우마의 효과에 대한 연구(Intergenerational Health Consequences of In Utero Exposure to Maternal Stress: Evidence from the 1980 Kwangju Uprising, Asia-Pacific Economic and Business History Conference 2013, Full Text PDF)는 상당한 시사점이 있다. 광주항쟁은 다른 재앙과는 달리 직접적인 희생자를 제외하면 신체적 위해가 없었고, 그 기간 동안 음식이 부족하지 않아 영양결핍을 경험한 것도 아니었고, 후속된 전염병의 창궐도 없었다. 그래서 대다수 광주시민이 겪은 외상은 심리적 충격이어서 트라우마의 정의에 잘 부합한다.

이교수는 임산부들이 트라우마에 특히 취약하다는 것과 이 영향이 태아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이것을 확인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항쟁시기 광주의 임산부들이 나은 신생아의 건강상태를 비교하는 것이다. 많은 연구에 의하면 신생아의 출생시점 몸무게는 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의 건강상태는 물론이고, 학력, 소득 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수준의 데이터는 1980년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자는 더 나아가, “광주항쟁기 임산부들의 트라우마가 태아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 태아가 출생, 성장해서 낳은 자식들, 그러니까 항쟁기 임산부들의 손주세대에까지 악영향을 미쳤을까”라는 문제로 접근했다. 다행히 1990년대 이후 자료들은 이 연구에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1980년 6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태어난 이들은, 광주항쟁시기에 부모의 태내에 있었을 것이다. 차트에서 보듯이 이 시기에 태어난 이들이 나이를 먹어서 광주에서 낳은 자식들을 전국평균과 비교해 보면, 광주지역의 신생아(트라우마에 노출되었던 임산부의 손주)들은 전국평균에 비해, 몸무게가 평균 56그램이 적게 나갔고, 저체중아일 확률도 2.5% 높았다. 이것은 모두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이었다. 또 임신기간도 짧았고, 조산아일 확률도 높았다. 다만 임신기간에 관한 통계는 적극적인 해석을 부여할 만큼 효과가 유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산모의 태어난 시기가 이 기간 이외인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Click the image for bigger size. Source: Lee (2013)

물론 이러한 단순 비교만으로는 트라우마의 효과인지, 아니면 여타 다른 효과인지 분명히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고려할 수 있는 다른 요소들, 아이의 성별과 몇 번째 아이인지에 관한 보건학적 요인들과 산모의 학력, 소득 등의 사회경제적 요인들을 다 콘트롤해서 분석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 효과의 크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측면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보건학 전문가들이 평가해 주실 것이고, 다만 이렇게 수대에 걸쳐 효과과 관찰된다는 것만으로도 나로선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리고 여러가지 한계도 있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 데이터의 제한때문에 1) 2000년, 2002년 두해만 대상이었다는 것, 2) 산모의 출생지 정보를 알 수 없어서 2000년과 2002년에 광주에서 출산을 한 산모의 출생지를 광주로 추정한 것 두가지는 저자도 지적하듯이 세심하게 봐야할 듯. 이 외에도 트라우마가 끼친 다른 영향들도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사회경제적 영향에 대한 분석이 없어서 조금 아쉽다. 다만, 저자가 한국전쟁이 태아에 미친 장기적 영향을 보건적 측면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측면까지 분석했던 것(In utero exposure to the Korean War and its long-term effects on socioeconomic and health outcomes, Journal of Health Economics, Full Text Gated)에 비추어 광주 트라우마 연구도 더 발절하리라 기대한다.

오늘은 518이다. 비록 항쟁의 상처는 옅어진 듯 보이지만, 그 심리적 고통의 흔적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길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느끼는 아픔은 사실 트라우마든 뭐든 어떤 단어로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드라이한 분석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518을 소심하게 보내며, 기억하기 위해 블로그에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