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6일 토요일

남재희 선생 장서 대방출에서 건진 몇권의 책

일주일 쯤 전 한겨레신문사에서 남재희 선생의 애장서 2만권을 사옥에 진열하고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는데, 행사 마지막날 다녀왔다. 아 정말 엄청난 콜렉션이었다..


남선생님이 백과사전적 인물인 것이, 사회과학, 인문학, 자연과학, 예술, 여행을 가리지 않고, 단행본과 학술지, 대중잡지, 화보로 다양했고, 언어도 한국어, 영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넘나드는. 온갖 전문 분야별 사전도 있었고, 아 이런 책까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들도 있었다.

도서 판매 마감 직전이어서 이미 좋은 책은 다 쓸어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책 탐사였고, 책 열 몇권을 구입했고 횡재했다는 느낌이었다. 점심 시간에 잠시 짬을 내고 간 것이라 더 살펴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었지만, 에이 나 말고 다른 이한테도 보석을 발견할 기회를 남겨줘야지 하는 생각에 그 정도로 만족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을 정신없이 보내느라, 책들이 차 트렁크에 있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꺼내서 차분히 살펴보았다.

1. 워싱턴 DC의 추억

20년 전 처음 미국에 갔을 때, DC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의회도서관과 스미소니언 박물관이었다. 그래서 고른 두권.


우선 Treasures of the Library of Congress (1980)는 의회도서관에 근무했던 Charles Goodrum의 작품으로 놀랄만한 화보로 가득찬 318페이지의 의회도서관 소개서로 예컨데 아래 사진은 의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Petrus Apianus가 1540년에 쓴 천제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Astronomicum Caesareum으로 저 페이지는 6층의 레이어로 돌아가는 서클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 아래 사진은 19세기에 유행했던 책 옆면에 금박으로 그림을 새긴 책으로 왼쪽은 Illustrations of Baptismal Fonts (1844)이고, 오른쪽은 The Life and Remains of Henry Kirke White (1825).


다음으로 Hail to the Candiate는 1992년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편찬한 미국 대통령 선거 홍보물의 역사로 이것도 기본적으로 화보집에 가깝다.


예를 들면 위 그림에서 제일 왼편부터 보면 데디 루스벨트 지지자들이 1912년 대선에서 옷에 달던 핀인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에서 따왔다고 한다. 루스벨트의 유쾌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을 상징한다고. 두번째 것은 링컨이 1864년 재선에 나서면서 사용한 포스터로 공화당이 아닌 National Union Party 소속임이 분명하게 강조되어 있다. 세번째 사진은 1950년대 TV 중계가 보급되자 민주당 측에서 전당대회에 참석하는 대의원들에게 주의사항을 적어 나눠준 팜플렛. 내용이 재미있다: 시간에 맞춰 일찍오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너무 TV 카메라 주목하지 말고, 등등. 그리고 마지막은 공화당의 쿨리지 후보가 너무 딱딱한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유머러스하게 자신의 사진을 시가에 부착했다고.

2. 위대한 언론

다음 세권은 각각 워싱턴 포스트 100주년 기념, 더 타임즈 200주년 기념 및 포린 어페어스 75주년 기념과 관련된 것들이다.


먼저 The Washington Post: The First 100 Years (1977)은 포스트에 23년간 근무했던 Chalmers M. Roberts의 역사서로, 500쪽에 가까워서 아마도 읽을 기회가 없겠지만 그저 샀다. 여기에도 인상적인 장면이 있는데,


왼쪽 페이지는 1971년 대법원이 펜타곤 페이퍼 보도에 대해,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언론의 손을 들어준 기념비적인 판결보도와 그것을 Katharine Graham과 Benjamin C. Bradlee가 보면서 웃는 모습이고, 오른쪽은 미국사에서 언론이 대통령의 하야를 가져온 유일한 사례인, 워터게이트 사건. 제일 위의 두 남자가 Bob Woodward와 Carl Bernstein이고, 아래는 닉슨대통령과 녹음테이프를 연결하는 절묘한 삽화.

위대한 언론은 인물을 바꿔 가면서 끝없이 발전해왔는데, 150주년에 다시 역사서가 나온다면 Jeff Bezos의 실험은 어떻게 묘사될지.

다음은 The Times, Past Present Future: To Celerbrate Two Hundred Years of Publication (1985), 이것은 앞의 포스트 역사서보다 훨씬 가볍다 (분량도 형식도). 더 타임즈는 1785년에 처음 발간되었는데, 사진이 실린 것은 1922년에 이르러서였다. 아래는 첫 사진 페이지.



또 지난 200년간 타임즈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서 엄청난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래 그림에서 재밌는 것은 1820년 캐롤라인 여왕에 대한 재판 즈음하여 등장한 그림인데, 왼편은 곰으로 표현된 여왕의 정부이고, 오른편은 여왕의 변호사 Henry Brougham인데 그의 방패의 문양이 바로 더 타임즈.


마지막 Foreign Affaris(Sep/Oct 1997)는 그 자체 75주년 기념호이다. 일단 다른 것은 모르겠고, 기념호에 기고한 필자들의 명성만 봐도 정말 입이 벌어질 정도. 슐레진저, 헌팅튼, 크루그만, 브레진스키, 드러커, 슬로터. 그리고 재미있는 것이 75년간 발행된 가장 중요한 책 소개하는 글이 있는데, 이 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남재희 선생이 뜯어낸듯 (그리고 조금 있다 이렇게 뜯겨진 서평이 어디로 갔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읽었던 책들

아래 세권은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고, 예전에 한글판으로 다 읽었던 책들이다.


우선 Herbert Stein의 책은 이제 기억도 잘 안나지만 그래도 닉슨과 포드 시절 CEA 의장이었던 이의 <대통령의 경제학 (김영사)>이여서, 그리고 워터게이트의 주인공 Bob Woodward의 또하나의 걸작 <공격 시나리오 (따뜻한 손)>는 너무나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라, 그리고 남재희 선생이 골프 책도 읽는구나 하면서 재미있어했던 Jack Nicklaus의 <골프 마이 웨이 (팩컴북스)>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그래서 샀다.

그런데 Woodward의 책에 몇장의 종이들이 끼워져 있었다.


내가 짐작하건데, 남선생은 1994년 12월 Economist의 올해의 책 기사를 통해 관심을 갖고, 이 책을 샀고, 그후 2015년에 The Guardian과 <한겨레신문>에서 관련 기사를 보고 오려서 책에 끼워 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래서 앞에 말한 Foreign Affairs에서 사라진 75년간의 명서 소개는 이런 방식으로 다 분해되서 각각의 책에 끼워져 있지 않을까 추측.

4. 미국 경제사

이번에 구입한 책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 The History of American Business & Industry (1972). 딱딱한 경제사 책을 잘 읽어내지 못하는 내 처지에 그냥 그때 그때 이리저리 넘겨가며 짧은 아티클들과 화보들을 보면 재미있을 듯.


한 장면만 소개하면, 미국인들의 개척정신. 골드러시 시대에 캘리포니아로 가자는 포스터(1849), 대륙횡단열차로 서부로 가는 노동자들(1869), 헨리 포드의 자동쟁기(automobile plow, 1908), 우라늄탄광(1940년대후반), 그리고 달에 도착한 인류.


이 책에는 또한 현대경제학을 만든 Paul Samuelson의 서문이 포함되어 있다. 그냥 몇 구절만 보면 "경제사 없는 미국사는, 햄릿이 등장하지 않는 햄릿과 마찬가지 ...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볼수 있는, 공장의 단순한 나사에 지나지 않는 작은 노동자, 그가 조립라인에서 볼트 999를 평생 돌리는 잊을 수 없는 이미지는 노동자의 '소외'에 대해서 허버트 마루쿠제나 청년 맑스의 책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얘기해 준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윌리 로만은, 세일즈맨 일생의 공허함에 대한 슬픈 사례이다.... 때때로 시스템의 역사적 잘못을 인식하는 것은 이 잘못을 바로잡는 첫걸음이다"

5. 아내를 위하여

끝으로 아래의 네권의 책은 내가 보려고 산 것은 아니고, 디자인과 영국사에 관심있는 토론토 출신 내 아내를 위한 것들.


좌상부터 시계방향으로, Illustrated Guide to Britain (2nd ed. 1976), Treasures of Canada (1995, 책 속의 건물은 내 아내의 모교인 토론토 대학이다), The Tower of London in the History of the Nation (1972), The Elements of Style: A Practical Encyclopedia of Interior Architectural Details, From 1485 to the Present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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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다보니, 이번에 구입한 책들은 대개가 서재에서 읽을 책들이라기 보다는 소파나 침대 옆 테이블에 두고 뒤적일 책들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나와 아내의 책읽는 취향이 많이 달라서, 내가 산 책에 아내가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데, 이번에는 여러 권 같이 볼 수 있을 듯.

끝으로 남재희 선생께 경의와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