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클라인바드의 '부자증세로 불평등 해결하려 하지 말라'는 주장......

불평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은 크게 보면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시장소득의 분배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최저임금 정책, 노동조합 정책 등)과 정부의 세입정책 (조세의 누진도)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출정책 (사회보장, SOC의 수혜계층)이다.

이 중에서 뒤의 두가지를 묶어서 재정정책이라 할텐데, 과연 조제와 정부지출 중 어떤 것이 더 불평등을 공략하는데 유효할 것인가 하는 것은 흥미로운 문제이다. 지난 주 USC의 Edward D. KleinbardNew York Times에 미국의 경우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올려 불평등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Don't Soak the Rich)는 주장을 발표하였다. 간단히 살펴보자.

  • 미국의 세제는 선진국 기준으로 충분히 누진적(progressive)
  • 2013년 재정절벽(fiscla cliff) 논쟁에서 보듯, 학자들이 원하는 수준으로 고소득층 세율을 올리는 것은 아카데믹하게는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고
  • 오히려 재정지출을 통해서 불평등을 다스리는 게 바람직
  • 푸드스탬프나 메디케어 등 사회보장지출이야 타겟이 저소득층이니, 당연히 불평등완화 효과를 갖고
  • 인프라나 국방비 등의 투자도 CBO의 계산에 의하면, 수혜층은 폭넓게 공유하는 것으로 분포. 즉 평균노동자의 200배 소득을 올리는 CEO가 고속도로의 혜택을 200배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 OECD 피어그룹으로 보면, 미국은 평균이상의 누진적인 세제를 갖고 있지만, 지출측면의 소득불평등 효과가 낮은 문제
  • 예컨데 독일의 경우 세전 불평등은 비슷하고, 세제는 역진적이지만, 정부지출로 미국보다 높은 평등 구현

일부 공감하는 바도 있고, 한국과 미국의 차이도 있고 해서, 몇가지 논점을 평가해서 메모해 둔다.
  • 우선 나는 세입 측면보다 재정지출 측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대체로 공감한다. 
  • 다음으로 OCED 평균이라는 것이 뭐 절대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한 준거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불평등 완화효과가 미국의 경우 세입은 평균이상, 재정지출은 평균이하이지만, 한국의 경우 세입과 재정지출 모두 평균 이하라는 점이 중요한 차이
  • 이것은 Isabelle Joumard, Mauro Pisu and Debbie Bloch (2013), "Tackling income inequality: The role of taxes and transfers", OECD Journal: Economic Studies, Vol. 2012/1에 등장하는 아래 표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따라서 한국의 경우 미국과 달리 세입과 재정지출 두가지 무기로 불평등과 싸울 필요 또는 여지가 있는 것으로 판단.
  • 클라인바드는 독일의 경우 세제의 불평등완화 효과가 미국보다 뚜렷이 낮은 것으로 주장하지만, 이것은 위 그림에서는 파악이 안된다. 이건 좀 더 살펴봐야.

클라인바드는 최근에 재정지출 개혁에 관한 단행본을 집필했는데, 이것도 흥미로울 듯: We Are Better Than This: How Government Should Spend Our Money (Oxford Univ. Press, 2014).

2014년 9월 9일 화요일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정치와 민주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논의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자유로운 시민들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 의사를 투표로 표출한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경제학에서 합리적인 경제인 (Homo Economicus) 가정에 대한 의문과 도전이 늘어나고 있는데, 정치학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밴더빌트의 정치학자 Larry Bartels는, 며칠전 WaPo의 Monkey Cage 블로그에서 스토니브룩 대학의 Cengiz Erisen 등이 수행한 sumbliminal prime 실험을 소개하면서 민주주의이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실험은 여럿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피실험자들은 자신에게 제시된 메시지를 읽고 의견을 밝힌다. 예컨데, 이런 메시지: “미국에 들어오고 있는 불법이민자의 수가 지난 6년간 급증하였다." 그리고 독립적인 실험조수가 이 반응이 긍정적이었는지, 부정적이었는지를 평가해서 기록한다. 당연히 피실험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영향을 미친다. 이민찬성론자들은 이민반대론자들에 비해서 긍정적인 반응이 38% 더 높았고, 부정적 반응이 34% 더 낮았다.

여기까지야 뭐 당연한 것인데, 이 실험은 숨겨진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메시지를 읽기 전에 아주 짧은 시간동안 화면에 다음과 같은 아이콘 중 하나를 '주제와 무관한 자극 (irrelevant stimuli)'으로 노출시켰다. 미소짖는, 찌푸린, 무표정한 얼굴. 효과는 매우 커서, 웃는 얼굴에 노출된 피실험자들은 찌푸린 얼굴에 노출된 피실험자들에 비해서, 부정적인 반응이 42% 낮았고, 긍정적인 반응이 160% 높았다.


Ersen 등은 노출시간이 0.039초로 극히 짧았기 때문에, 피실험자들은 자신이 이런 화면에 노출되었는지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자극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정치학보다는 마케팅이론에서는 널리 알려진 것으로 subliminal advertising이라고 부르는 광고기법이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음향이나, 영상을 삽입하여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는 것.

이 포스팅 이후에 컬럼비아의 정치학자 (아마도 황승식 교수 등은 통계학자로 분류하겠지만) Andrew Gelman은 이 효과가 너무 커서, 신뢰도에 의문을 표시했고, Bartels는 다시 추가로 답변하는 등 몇가지 설왕설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좀 더 진행될 듯하다. 아마도 원저자들이 나서지 않을까 싶은데.

나도 개인적으로 subliminal effect가 이렇게까지 클까라는 점에서는 의문을 갖고 있다. 내가 마케팅분야 전문가가 아니어서 조금 그렇지만, 상품 광고에서도 이렇게 효과가 분명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하지만 충분히 관심을 갖을 만한 주제로 생각하고, 좀 더 챙겨볼 계획이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방송광고심의에 관한 규정> 제15조(잠재의식광고의 제한)는 "방송광고는 시청자가 의식할 수 없는 음향이나 화면으로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방식을 사용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subliminal advertising의 방송광고를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방송광고는 <방송법> 제2조 제21호에서 '"방송광고"라 함은 광고를 목적으로 하는 방송내용물을 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어서, 방송을 통한 정치광고에 subliminal effect를 첨가하는 것이 불법인지는 조금 애매한 듯하다.

Links


2014년 8월 24일 일요일

The Mythical Swing Voter

늘 그렇듯 앤드류 겔만의 주장은 흥미진진.

  • (문제의식) 미국은 정치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이 좀처럼 자신의 지지정당(후보)를 변경하지 않을텐데, 어떻게 대선 기간의 여론조사는 그렇게 진폭이 클까? 대규모 스윙 보터의 존재는 정치양극화와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 (확률표본과 poststratification) 여론조사는 응답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무작위추출을 해도 편이가 없는 확률표본을 구성할 수 없다. 그래서 사후적으로 가중치조정을 하게 되는데, 이때 주로 고려하는 것이 인구학적 요소들이다. 한국의 경우라면 연령/성별/지역이 대표적일 것.
  • (사례) 겔만 등은 2012년 미국 대선 마지막 45일 기간동안, 8만명 이상으로 구성된 패널을 대상으로 반복적으로 대선지지후보 조사를 수행. 
  • (스윙의 증거) 아래 그림은 지지자 없음 등은 제외하고 오바마지지나 롬니지지를 밝힌 유권자 중 오바마 지지율. 밴드는 95% 신뢰구간. 통상적인 인구학적 poststratification 처리후 결과. 

  • 가로 점선은 대선 오바마 득표율, 세로점선은 세차례에 걸친 대선후보 TV 토론일자로 상당히 큰 폭으로 아래위 출렁거렸고, TV 토론이 중요한 분수령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차트는 실제 당시의 각종 여론조사 결과와 유사한 모습.
  • (스윙의 반증) 위 그림에서 1차토론 전후 1주일동안 오바마 지지율은 10포인트 정도 급락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같은 기간 지지후보 변경비율을 추정해 보니, 극히 미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바마->롬니 변경은 0.5%를 갓 넘고, 롬니->오바마 변경은 0.2% 정도. 가로막대는 95% 신뢰구간.

  • 겔만 등은 TV 토론의 효과는 지지 후보를 교체한 것이 아니라, 토론에서 죽을 쓴 후보의 지지자들이 설문에 응답하지 않고, 반대로 활약을 한 후보의 지지자는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을 확인한 것이 아래 그림. 이를 확인 하기 위해, 인구학적 변수로 poststratification을 한 것 (흐린 부분) 외에, Party ID(당적? 지지정당?)을 추가적인 가중치로 해서 poststratification을 수행 (짙은 부분). 이렇게 Party ID를 추가적으로 고려하면, 실제 득표율로부터 변동이 매우 축소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도 몇가지 시사점이 있는 듯 한데,

  • 한국도 정치 양극화가 상당해서 단기간에 (캠페인 기간 중에) 토론 한번 잘한다고, 또는 특정 공약 발표한다고, 여야 지지후보를 바꾸는 경우 크지 않을 것이다.
  • 그렇다고 이걸 너무 집토끼/산토끼 구분으로 해서, 우리편(?) 지지자에게만 소구하는 강공으로 나가면 된다고 하는 건 또 너무 단순한 것 같다. 강공만으로 집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 유비에 비추어 보면 답답해지는 측면도 크다.
  • 우리나라 여론조사 기관들도 관심이 있을 듯한데, 당적을 갖는 인구의 비율도 낮고, 유권자 등록시 지지정당을 밝히는 제도도 없고 해서, 우리는 보다 정확한 예측을 하기 위한 추가적인 도구가 무엇인지 고민이 있어야 할 듯.

2014년 7월 31일 목요일

[독후감]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마이클 S. 최 지음 (허석재 옮김),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 게임이론으로 본 조정 
문제와 공유 지식>, 2014년 7월,
후마니타스 출판사.
얼마전 국역된 Michael Chwe (최석용)의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 게임이론으로 본 조정 문제와 공유 지식 Rational Ritual: Culture, Coordination, and Common Knowledge>은 가벼운 마음으로 들었다가 내용이 너무도 무거워 당황한 책이었다. 두세 시간이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다 읽는데는 며칠 걸렸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다시한번 꼼꼼히 읽어보고 싶은 그런 매력적인 책인데, 우선 극히 주관적으로 내가 주목했거나, 내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한 바를 간단한 메모로 남긴다.

조정 Coordination

경제학자들에게 익숙한 네트워크 외부성에서 시작해 보자. 우리가 소비하는 재화 중 어떤 것들은 다른 이들이 얼마나 사용하는가에 따라 나의 만족도가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보통 많이 드는 예가 팩시밀리인데, 만약 세상에 아무도 팩스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내가 구매한 팩스의 가치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 친구가 팩스를 보유하고 있다면, 나는 그 친구와 문서를 주고 받을 가능성이 있으니 약간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고, 나아가 수 많은 사람들이 팩스를 보유하고 있다면 내가 보유한 팩스의 가치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건 너무 뻔한 것인데, 이것을 조정의 관점에서 보자. 충분히 팩스의 사용자 베이스가 클 때는 소비자가 기꺼이 팩스를 사겠지만, 최초의 소비자에게 어떻게 팩스를 사게 할 수 있을까? 그 최초의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팩스의 가치가 전혀 없는데. 그러니까 집단의 입장에서 보면 팩스의 구입이 합리적이지만, 개인의 입장에서는 다른 이들이 현재 팩스를 갖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그들이 팩스를 구입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면, 이 집단은 아무도 팩스를 사지 않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수 많은 소비자들의 '조정'이 필요한 상황.

이에 대해서 경영학에서의 해답은 여러가지가 있다. 예컨데 팩스제조업체는 상위주체와 복수 공급계약을 맺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예컨데 정부와 계약을 맺고 전국의 수많은 관공서에 동시에 공급하는 것. 이것은 수많은 공공기관 구매부서들이라는 복수 주체의 조정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상위의 계약자를 찾아서 해결하는 것. 공동구매도 유사한 메카니즘. 또는 초기의 구매자들에게 엄청난 할인을 해주거나, 심지어 무료로 제공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면 초기 구입자는 부담이 없거나, 적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구매할 것이라는 믿음이 적더라도, 그러니까 조정이 덜 되더라도, 부담이 적기 때문에 구매에 나설 수 있다. 뭐 이 유사한 여러 해법들이 있다.

공유 지식 Common Knowledge

최교수는 또 다른 해법으로, 광고에 주목한다. 통상 상품들의 광고는 "이 제품은 이러저러한 효능이 있어요"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런 재화는 "다른 수많은 사람도 이 광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그 광고 보는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포함한 다른 수많은 사람이 이 광고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라는 공지성(publicity)을 알려주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시 시청자수가 높은 수퍼볼과 같은 TV 프로그램의 광고는 엄청나게 비싼 광고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이러한 네트웍 재화(최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사회적 재화)가 몰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유지식의 관점이 경제 뿐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 등 여러 영역의 문제 해결에 요긴하다고 저자는 믿고 있다. 예컨데 시위에 참여할 때 아주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나 외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내가 잡힐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한국어 제목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는 상당히 좋은 번역어라는 생각이 든다.

또 공지성을 높일 수 있는 물리적 기제가 원형 구조물이다. 고대의 원형극장이나, 미국 몇몇 도시의 원형 시티홀 같은 것. 극장의 관객이나 위원회 멤버는 원형의 중앙에서 펼쳐지는  공연이나 연설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다른 관객 또는 위원들도 나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다른 멤버들에게 알리고....이런 것. 특히 흥미로운 것은 벤담의 판옵티콘에 대한 최교수의 해석이다. 중앙의 감시탑에서 원형으로 배치된 감옥의 각 셀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감시의 비용은 줄어들지만 (중앙집중성), 반대로 이 원형 구조는 원형극장과 동일한 포맷이기 때문에 많은 수감자들 사이의 조정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예컨데 중앙 감시탑의 감시자가 졸았다고 해보자. 수감자는 감시자가 졸고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셀의 수감자들도 감시자가 졸고 있다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수 있다. 탈옥을 모의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중앙의 감시자는 수감자를 바라볼 수 있지만, 반대로 수감자가 감시자를 바라볼 수 없도록 하는 불투명 유리의 설치가 필요하고 (비대칭성), 또한 수감자들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수 없도록 셀 사이의 간막이를 중앙을 향해 연장시켜야 한다 (분리성).

제사장 또는 정치가

이 책의 원제는 합리적 의례이다. 왕실의 행차, 혁명기의 페스티벌,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통한 의례적 실천 등은 모두 다수의 국민들에게 발화자의 메시지를 전달할 뿐 아니라, 다른 국민도 그 메시지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공지성을 높이려는 시도이다. 제사장의 역할에서 이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정치가도 동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정치가의 컨텐츠가 일차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나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을 행동에 나서게 하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팩시밀리 구매와 투표를 비교해보자. 나는 정치가 A후보가 좋아 보이는데, 만약 모든 유권자 중에서 나 혼자 A를 지지한다면 거의 어떤 의미도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투표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또 그렇다면 정치가 A는 자신의 매력을 유권자들에게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다른 유권자들도 자신의 매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까지 알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것들. 그런 점에서 정치가는 제사장.

이런 생각을 해봤는데, 매우 아쉽게도 이 책에는 경제와 문화에 대한 폭 넓은 사례들이 나오는데, 정치에 대해서는, 저자가 UCLA 정치학과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사례가 많지 않다.

그리고 기타......

내가 마이클 최를 저음 알게 된 것은, 작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게임 이론가 제인 오스틴 Jane Austen, Game Theorist>에 대한 서평을 보고서였다. 약간 끌리긴 했지만, 책을 구해서 읽지는 않았다. 이론의 사례를 문학이나 서사에서 찾는 것이 그 흥미로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너무 억지로 가져다 붙이는 느낌이 있어서였다. 예컨데  스티븐 브람스(Steven Brams)는 공정분할(Fair Division)에 대해 멋진 저작을 남긴 게임이론가이지만, 성경을 게임이론으로 해석하겠다는 시도였던 <성경의 게임: 게임이론과 히브리 성경 Biblical Games: Game Theory and the Hebrew Bible>은 별로였고, 또 제인 오스틴에 대한 행동경제학적 설명, 이런 논문도 본 적이 있는데 이것도 썩 와 닿지 않았었다. 이런저런 기억들 때문에 미뤄두었던 것인데, 마이클 최의 책이라면 읽고싶다는 생각이 확 든다. (누군가 번역하고 있겠지? 아마도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이 책 번역 매우 훌륭하다. 아주 사소한 오탈자 외에는 심각한 오역처럼 느껴지는 부분 없었고, 아주 어려운 내용임에도 그래도 잘 읽힌다. 역자후기에 의하면 마이클 최의 아내 이남희씨가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데, 시카고 대학 사회학 박사이고, 또 그때그때 필요하면 저자와 바로 대화했을테니, 그녀의 역할이 상당했을 것 같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역자의 실력과 성의가 기본이고.

그리고 왜 이렇게 읽기가 어려울까 생각해보니, 이 책은 게임이론에 대한 사전지식보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쉽지 않은 그런 책이다. 수시로 튀어나오는 미쉘 푸코, 레비 스트로스, 하버마스, 루소 등등은 무척 당황스럽더라는.

어쨋든 개인적으로는 내 현장인 정치의 영역에서 이 책의 내용을 더 곱씹어 보고 싶다. 그리고 강추!

2014년 6월 3일 화요일

Equality of Opportunity 연구와 조세정보접근 방법

연초에 나는 Raj Chetty가 이끄는 The Equality of Opportunity 팀의 세대간 계층이동성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면서, 데이터 측면의 특징으로 '조세정보'를 직접 사용한 것을 들었다. 구체적인 방법을 몰라서 궁금해 하던 차에, Science의 과학정책 에디터인 Jeffrey Mervis가 이에 대해 쓴 기사를 발견. 읽어보니 내가 일부 오해한 것도 있고, 추가적으로 알게된 것도 있고 해서 정리해 둔다.

우선 오해한 것. 나는 IRS가 소득세 정보 중 일부항목을 제거 또는 수정하여 신원 추적을 못하도록 한 후에 (소위 de-identification), 이를 연구자들에게 제공하고 연구자들은 이를 활용하여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게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이고, 어려운 과제로 생각했던 것인데 이게 완전 오해였다. IRS는 가계단위의 조세정보는 가공여부와 무관하게 전혀 연구자들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들.

사회보장번호. 미국의 경우 1978년부터 소득세신고서의 부양가족 항목에 사회보장번호를 적는 것을 의무화. 가공의 부양자를 적발하려는 것으로 실제 78년에 갑자기 부양가족수가 수백만명이 줄었다고. 내가 늘 주장하는 것이지만, 한국은 주민등록번호 천국이기 때문에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어마어마어마어마한 데이터가 있는 나라. 국세청자료에도 다 들어있고, 학교의 학적부에도, 수능시험 원서에도, 건강보험자료에도. 나는 언제고 이 모든 자료에 적절한 방식으로 억세스하게 하면 어마어마어마어마한 정책적 발전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프라이버시를 매우 중시하는, 그래서 주민등록번호를 적지 못하게 하자거나, 심지어 주민등록번호를 아예 없애버리자는 분들의 주장은 충분히 그 취지는 이해하지만 확 지지하게 되지는 않더라는.

IRS 외부 연구 지원. Chetty 등은 2011년 IRS 연구공모에 응해서 선정된 것. 그해에 총 51 프로젝트가 지원해서, 19 개가 선정되었고 최종적으로 16 개 연구가 수행. 우리나라 국세청도 이런 외부연구 프로젝트가 있는지 확인 필요. 실제 IRS도 외부연구에 무척 소극적이었는데, 프린스턴의 걸출한 경제학자 Alan Krueger가 재무부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부임하면서부터 활기를 띄게 되었다고.

기이한 또는 절묘한 방식. 이게 가장 눈에 띄는데, 1) 랜덤한 숫자들로 채워진 더미 데이터를 연구진에게 제공 2) 연구진은 이 더미를 이용해서 프로그램을 테스트 3) 최종 프로그램을 IRS에 제공 4) IRS가 프로그램을 돌리고 5) 결과물을 연구진에게 제공. 어찌보면 진짜 비효율적이고, 오류가 많을 듯한데, 어쨌든 민감한 데이터를 건드리는 일이니 이것이 유일한 해결책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이런 방식 검토 필요.

재현 또는 검증. 사실 이렇게 연구가 수행되다 보니, IRS의 별도 승인을 받지 않으면 이들 연구의 핵심 발견에 대해 검증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문제가 있다. 이건 뭐 그 자체로 또 해결하면 될 듯하고.

좌우간, 이래서 국세청과 조세재정연구원에 대한 푸시가 필요한데, 한국경제학회나 재정학회 등에서 좀 나서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 결과물이 어느 정파, 어느 계급에 직접적으로 유리불리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쨋든 나의 신조는 We can't do evidence-based policy without evidence 그리고 진실은 민중의 무기.

2014년 5월 28일 수요일

페이스북 한국 지방선거에 공식 “투표인증” 기능 도입

페이스북은 과거 미국과 인도 등 일부 선거에서 적용되었던, “투표인증(I'm a Voter)" 기능을 한국의 지방선거를 포함하여 전세계적으로 확대한다고 최근 발표하였다. 아직 한국에서의 인터페이스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과거 사례로 미루어 보면 한국의 사용자들은 선거일 당일 아래와 유사한 화면을 보게 될 것이다.

<확대된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림을 클릭  >
선거일이라는 것을 알리는 타이틀 아래, 그 시점까지 투표인증을 한 친구의 프로필 사진, 친구의 수 및 전체 투표인증인 수를 표시한다. 그리고 해당사용자에게 투표인증 버튼을 눌러 인증에 동참할 것을 유도한다.

대표적인 민주주의의 구성원리는 “다수에 의한 의사결정”이다. 정당이 선거과정에서 보다 좋은 정책을 만들려고 하는 것, 보다 훌륭한  정치인을 발굴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정책과 인물을 유권자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은 모두 다수의 지지를 받으려는 행동이다. 하지만 다수가 지지하는 것과 그 지지를 투표로 행사하는 것은 밸개의 일이다. 투표하지 않는 유권자의 의사가 반영될 통로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거운동의 또 한 축은 지지자들을 설득하여 투표하게끔 하는 것이다. 특히 선거일 당일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통상 “투표독려 (Get Out the Vote)"라고 불리운다.

하지만 실제 투표율을 높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투표는 소중한 행동입니다”와 같은 호소도, “우리 정책이 월등히 더 좋으니, 꼭 투표해주세요”와 같은 설득도 크게 효과적이지 않다. 정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가족이나 친구의 면대면 압력 (social pressure)이 유효하다. 이것을 투표의 전염성(contagious voting)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전염의 속도가 너무 낮다는 것이다. 사례에 따라 다르지만, 지인들의 면대면 투표독려의 효과는 대략 1~10%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면대면 투표독려는 매우 힘든 일이다. 한사람이 투표 당일 과연 몇 명에게 독려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면대면 독려활동에 나서겠는가? 그래서 투표독려 활동은 중요한 선거운동이지만 어렵고 효과가 낮아 적극적으로 활용되지는 않고 있다. 물론 불법적인 것을 포함하면 얘기가 다르다.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과거 독재시절 자동차를 동원해서 유권자들을 투표장까지 실어 날랐던 행위를 생각해 보라.

반면 정보통신의 발달은 투표독려 활동에 새 지평을 열었다. 필자는 2002년 대통령선거 당일 친구들로부터 투표하러 가야한다는 문자메시지를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받았다. 투표를 하지 않으면 큰 죄를 짖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도 친구들에게 독려해야 한다는 상당한 압력(?) 또는 희열(?) 뭐 그런 것을 느꼈었다. 그리고 최근의 총선과 대선에서는 투표장 앞에서 찍은 소위 인증샷이 대유행이었다. 이것은 휴대폰에 장착된 카메라와 사진전송 기능 덕이었다. 다만 그 효과는 다양한 설이 분분할 뿐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다행이도, 페이스북은 투표인증 기능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에 앞서, 2010년 미국 연방 상하원 선거에서 방대하고 치밀한 실험을 수행하였고, 그 결과를 <네이처 Nature>지에 발표한 바 있다. 이들은 6천만명 이상의 미국 페이스북 사용자들을 임의로 세 그룹으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 그룹(소셜정보그룹)의 페이스북 화면은 위에서 소개한 것과 동일한 내용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두 번째 그룹(단순정보그룹)의 화면에는 위의 내용 중에서 페이스 북 친구 중 누가 투표했는가에 대한 사진과 이름을 제외하고 전체 투표자 수만 알려주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통제그룹)의 화면에는 아예 선거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확대된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림을 클릭>

결과는 매우 흥미로운데, 우선 투표선언(투표인증 버튼의 클릭)으로 투표율 제고의 효과를 측정해 보면, 소셜정보그룹에 속한 사용자들이 단순정보그룹에 비해 2.08% 더 투표율이 높았다. 통제그룹의 사용자들에게는 투표인증 버튼 자체가 없었으므로 이 그룹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몇 명이 투표했는가에 관한 페이스북 정보에 비해, 나의 페이스북 친구들 중 누가 얼마나 투표했는가라는 사회적 정보에 접하게 되었을 때 상당한 효과가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이러한 투표선언이 늘어난 것이 실제 투표의 증가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실제 투표를 추적하였다. 미국의 경우 일부 주에서는, 연구목적일 경우 투표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자료를 통해 보니, 소셜정보그룹에 속한 사용자들이 단순정보그룹에 비해서도, 통제그룹에 비해서도 모두 실제 투표가 0.39% 더 높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투표인증 버튼을 누른 것의 상당 부분은 지인들의 사회적 압력에 대한 거짓 반응으로 과장된 측면이 있다 (2.08%가 아닌, 0.39% 투표율 제고). 두 번째 투표율 제고는 전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단순정보그룹과 통제그룹 사이에 차별 없음).

마지막으로 연구진은 한 단계 더 나아가, 페이스북 친구 중에서 가까운 친구와 소원한 친구의 투표율 제고 효과가 다른가라는 문제를 살펴보았다. 페이스북 상에서의 상호활동(댓글쓰기, 좋아요 버튼 클릭, 태그 붙이기 등)의 빈도를 통해서 해당 사용자의 친구를 10개의 소그룹으로 나누었다 (가장 소원한 1소그룹에서부터 가장 친밀한 제10소그룹까지). 이들 소그룹별로 효과를 살펴본 결과는 1~7소그룹에 속한 친구들이 투표율을 높이는 효과는 거의 없고, 8소그룹에 속한 친구의 효과는 어느정도 있지만, 우연일 가능성을 기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9소그룹과 10소그룹 효과는 각각 0.172%, 0.224%로 뚜렷이 높았다.

요약하자면, 페이스북이 도입한 투표인증기능은 투표율을 분명히 높인다. 2010년 미국실험과 시뮬레이션의 결론은 순수히 페이스북 효과만으로 34만명 이상이 추가적으로 더 투표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 작동방식은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친구들을 통해서, 특히 가까운 친구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비록 투표율 제고의 효과가 높아 보이지 않겠지만, 페이스북이 초대규모 네트웍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투표인증 버튼을 클릭하는 독려활동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최근의 선거들이 대부분 박빙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페이스북의 공인 투표인증 기능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광주의 트라우마는 멀리 흐른다.....

심리적 외상으로 번역되는 트라우마는 인간이 전쟁, 기근, 천재지변 등 외부의 충격이 너무 커서 정신적 장애와 그에 수반되는 육체적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지칭하는 심리학적 용어인데, 이런 특이한 단어가 일상어가 되어 버렸다. 위험사회로 불리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트라우마에 대한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육체적,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얼마나 지속되는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 경제학부의 이철희 교수의 광주항쟁시기 양민학살이 광주의 임산부들에게 초래한 트라우마의 효과에 대한 연구(Intergenerational Health Consequences of In Utero Exposure to Maternal Stress: Evidence from the 1980 Kwangju Uprising, Asia-Pacific Economic and Business History Conference 2013, Full Text PDF)는 상당한 시사점이 있다. 광주항쟁은 다른 재앙과는 달리 직접적인 희생자를 제외하면 신체적 위해가 없었고, 그 기간 동안 음식이 부족하지 않아 영양결핍을 경험한 것도 아니었고, 후속된 전염병의 창궐도 없었다. 그래서 대다수 광주시민이 겪은 외상은 심리적 충격이어서 트라우마의 정의에 잘 부합한다.

이교수는 임산부들이 트라우마에 특히 취약하다는 것과 이 영향이 태아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이것을 확인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항쟁시기 광주의 임산부들이 나은 신생아의 건강상태를 비교하는 것이다. 많은 연구에 의하면 신생아의 출생시점 몸무게는 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의 건강상태는 물론이고, 학력, 소득 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수준의 데이터는 1980년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자는 더 나아가, “광주항쟁기 임산부들의 트라우마가 태아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 태아가 출생, 성장해서 낳은 자식들, 그러니까 항쟁기 임산부들의 손주세대에까지 악영향을 미쳤을까”라는 문제로 접근했다. 다행히 1990년대 이후 자료들은 이 연구에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1980년 6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태어난 이들은, 광주항쟁시기에 부모의 태내에 있었을 것이다. 차트에서 보듯이 이 시기에 태어난 이들이 나이를 먹어서 광주에서 낳은 자식들을 전국평균과 비교해 보면, 광주지역의 신생아(트라우마에 노출되었던 임산부의 손주)들은 전국평균에 비해, 몸무게가 평균 56그램이 적게 나갔고, 저체중아일 확률도 2.5% 높았다. 이것은 모두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이었다. 또 임신기간도 짧았고, 조산아일 확률도 높았다. 다만 임신기간에 관한 통계는 적극적인 해석을 부여할 만큼 효과가 유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산모의 태어난 시기가 이 기간 이외인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Click the image for bigger size. Source: Lee (2013)

물론 이러한 단순 비교만으로는 트라우마의 효과인지, 아니면 여타 다른 효과인지 분명히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고려할 수 있는 다른 요소들, 아이의 성별과 몇 번째 아이인지에 관한 보건학적 요인들과 산모의 학력, 소득 등의 사회경제적 요인들을 다 콘트롤해서 분석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 효과의 크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측면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보건학 전문가들이 평가해 주실 것이고, 다만 이렇게 수대에 걸쳐 효과과 관찰된다는 것만으로도 나로선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리고 여러가지 한계도 있을 것 같은데, 무엇보다 데이터의 제한때문에 1) 2000년, 2002년 두해만 대상이었다는 것, 2) 산모의 출생지 정보를 알 수 없어서 2000년과 2002년에 광주에서 출산을 한 산모의 출생지를 광주로 추정한 것 두가지는 저자도 지적하듯이 세심하게 봐야할 듯. 이 외에도 트라우마가 끼친 다른 영향들도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사회경제적 영향에 대한 분석이 없어서 조금 아쉽다. 다만, 저자가 한국전쟁이 태아에 미친 장기적 영향을 보건적 측면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측면까지 분석했던 것(In utero exposure to the Korean War and its long-term effects on socioeconomic and health outcomes, Journal of Health Economics, Full Text Gated)에 비추어 광주 트라우마 연구도 더 발절하리라 기대한다.

오늘은 518이다. 비록 항쟁의 상처는 옅어진 듯 보이지만, 그 심리적 고통의 흔적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길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느끼는 아픔은 사실 트라우마든 뭐든 어떤 단어로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드라이한 분석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518을 소심하게 보내며, 기억하기 위해 블로그에 남겨둔다.

2014년 5월 8일 목요일

<불평등 민주주의>를 읽고 (I)

조금 전에 래리 M. 바텔스의 <불평등 민주주의 (21세기북스)>를 다 읽었다. 읽기 시작한 것은 꽤 되는데, 중간에 책을 분실해서 다시 사기도 했고, 뭐 다 아시는대로 최근 얼마간은 책이 잘 읽히지도 않았고. 여하간 다 읽고 난 소감은, 정말 대단한 책이라는 것, 내가 최근 몇년간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런 느낌. 이 책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머리속에 막 떠오르는 대로, 약간의 인상 비슷한 그런 것을 좀 풀어볼까 한다.

아시다시피 지난 대선의 결과를 두고, 가난한 계층일수록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더 높았다는 것에 기초해서 한국에서는 "역 계급투표 현상"이라는 주장이 대 유행이었는데, 이 때 아마도 가장 많이 논거가 된 책이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갈라파고스)>였다.

프랭크의 이 책은 미국에서 2004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그 직후 있었던 미국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W.의 당선을 설득력있게 예측하고 설명했다고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 요지는 1)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중부의 가난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2) 그 내용은 동부와 서부의 래디컬 엘리트들에 맞서 전통적인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 3) 그래서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노동자계층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게 되었다는 것 4) 그래서 민주당은 이제 새로운 전략으로 이들에게 문화적으로 다가갈 것을 제안한다, "민주당은 밀농사를 짓고, 총을 쏘고, 스페인어를 말하며, 맥주를 들이키고, 성경을 들고 다니는...."

그런데 바텔스는 이러한 프랭크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1) 백인 노동계층은 민주당에 등을 돌리지 않았고 2) 백인 노동계층이 더 보수적으로 변화하지도 않았고 3) 도덕적 가치가 경제적 이슈보다 투표에서 더 중요해지지도 않았고 4) 종교적 유권자가 경제적 이슈에 무관심해지지도 않았다는 것.

요는 경제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 중에서 어떤 것이 정치를 결정하는데 더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인데, 굳이 조야한 개념을 쓰자면 경제결정론과 문화결정론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두 주장 중 어떤 것이 더 그럴듯한가에 대한 논의는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 다만 전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전자에 훨씬 더 끌린다.  나는 아마도 맑스의 분석에 거의 어떤 것도 동의하지 않지만,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경제적 이해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성향을 결정한다'라는 것만은 받아들인다. 뭐 쌍방향성도 있을 것이고, 그 결정이라는 것이 최종심급일 것이고 이런 저런 수식어가 필요하겠지만. 근데 사실 대부분의 한국의 맑스주의자들은 이런 식의 맑스주의를 비웃을 가능성이 크다. 속류맑스주의 또는 스탈린식 맑스주의 운운.... 좌우간 나는 그렇다는 정도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두 주장에 대한 지지기반이 다르다는 것. 정치학자들은 2004년 출구조사를 '선거에서 도덕적 이슈가 가장 중요했다'라고 해석하는 것을 비웃었지만, 수많은 언론인들과 논객들은 '노동자계급이 문화적으로 보수화되어 공화당이 승리했다'라는 프랭크류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이에 대해서 내가 추측하는 것은 두가지.

첫째, 문학적인 측면에서 프랭크의 책은 바텔스의 책보다 훨씬 더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프랭크는 훌륭한 르뽀르타쥬 작가고, 그의 글에는 흥미로운 예화가 있고, 그래서 그의 주장은 무미건조한 나열이라기보다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로 들린다. 반면에 바텔스는 학술서적이 아닌 대중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지만, 여전히 딱딱하고, 캔자스에서 만난 실제하는 한 백인의 육성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미 상무부와 노동부의 통계, 수많은 여론조사 그리고 이것에 대한 분석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한다. 이 차이는 결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두번째로, 이건 사실 내 주변의 친구들을 통해서 추측하는 것인데, 아마도 그 가치투표를 주장하는 언론인과 논객들, 이들은 대부분 좋은 대학 나오고, 상당한 소득이 있거나 (이 소득을 포기하고 대신 명성을 택했거나) 한 그런 류이면서, 동시에 리버럴 성향이 강한 그런 경향이 있는 것 아닐까? 즉 스스로가 역계급적 정치행위를 하고 있어서, 대중들이 역계급적 정치행위를 할 것이라는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

이상이 바텔스의 책에 대한 인상평이었고, 책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는 다음에 하겠다(라고 여기에 선언(?)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즘은 다 잊어버려서....메모를 해두겠다는 의지이고, 선언을 통해 그 의지를 좀 못박는...).

책의 번역은 대체로 훌륭하다. 다만 아쉬운 것이 조금 있는데, 첫째는 주석에 대한 것, 원문의 각주가 번역서에서는 후주로 되어있는데, 난 이건 나쁘지 않다고 본다. 다만 상당수의 주석을 누락시킨 것은 아쉽다. 번역을 해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건 별로 어려운 수고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누락시킨 것들은 대부분 출처를 밝히는 것들이어서 그냥 기계적으로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들.

두번째로 크게 아쉬운 것은 원서에 있는 index를 통째로 생략한 것, 이 책은 한번 읽고 치우는 류의 책이 아닌데, 이것이 생략되어서 매우 불편하다. 나는 다행히 한 대학 도서관을 통해서 원서의 e-book에 접근할 수 있어 필요하면 원서에서 찾고 번역서에서 확인하는 방식이었는데...좌우간 불편. 그런데 이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것이 번역서 주석 만들어 보신 분은 알겠지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서....(난 과거에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자본론 세권 전체의 인덱스를 만들었는데, 그 때 인덱스 만드는 수고비로 출판사에서 한학기 등록금 이상을 받았지만, 한 일에 비해 보수가 박했다는 느낌이.....).

2014년 4월 30일 수요일

Piketty's Book Is NOT Hot in France.

미국에서 Piketty의  붐이 과열 수준까지 가고 있고, 온갖 분석이 다 나오더니, 이제 "도대체 왜 프랑스인들은 미국인들만큼 열광하지 않는가"라는 질문까지. NY Times와 Foreign Affairs에서 경쟁적으로 기사를 냈는데, 유익한 편. 그리고 한국어판의 운명에 대한 예측도 어느 정도 가능할 듯.

  1. 덜 신선한 피케티: 프랑스에서는 오래전부터 피케티가 사회당의 주요 인물이었고, 2007년 대선에서 Ségolène Royale의 경제자문역부터 지금까지 핵심인사들과 긴밀하게 연결. 프랑스인들에게 피케티는 좀 지루해진 인물.
  2. 덜 충격적인 불평등미국인들과는 달리 프랑스인들은 대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고, 심각하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어서, 책 자체가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아.
  3. 프랑스의 경제침체최근 경기가 나빠서, 사회당 대통령부터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감세, 정부지출 삭감 등이 영향력 확대 중. 증세에 대한 인기가 예전같지 않아.
  4. 이론적 문제피케티가 지나치게 신고전파 경제학 이론을 활용한다는 비판. 좌파들의 태도로 이러한 비판은 미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거세.
  5. 학자에 대한 존중 부족프랑스 엘리트들은 Grandes Écoles 중심으로 양성되고, 이들은 대학의 학자들에 대한 존중 별로 없다
  6. 경제학에 대한 존중 부족프랑스에서는 1968년이 되어서야 경제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받게 되. 그전에는 법학의 하위 분과로 취급.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철학자나 역사가 등이 누리는 존경을 받지 못해.
  7. 실증작업에 대한 인정영미권에서는 피케티에 대한 반대자들까지도, 피케티의 엄격하고 방대한 실증작업에 대한 높은 평가 존재. 프랑스에서는 그냥 높은 과세를 요구하는 좌파 중의 좌파 이미지가 더 지배.


일부는 서로 상반되는 항목도 있지만, 뭐 그런 저런 이유가 다 작동했을 듯. 한국에서는 어떨지 궁금한데,

  1. 일단 이 책에 한국 실증이 전혀 없다는 것은 흥행에 치명적일듯. 이 점은, 이 책을 떠나서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아쉬운 대목이다. 피케티 등이 주도하는 The World Top Income Database는 선진국부터 개발도상국까지 여러 나라들에 대한 분배통계가 정리되어 있거나 정리 중인데, 한국은 아예 빠져있다. 
  2. 프랑스 경제학(자)에 대한 무시, 뭐 이런 것이 좀 있어서 이것도 흥행에 불리할 듯. 샌델의 정의론이 대박을 친 이유중의 하나는 "하버드 교수가 하버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강의를 책으로 정리"했다는 것.
  3. 미국에서의 열풍은 상당한 플러스 요인일 듯. 미국학계에 대한 사대주의(?)가 아주 강해서, 노벨상을 받은 크루그만이 솔로우가 또 누가 극찬을 했다는 것, 아마존 베스트 셀러 1등을 했다는 것이 마케팅 포인트 중 하나일 듯.
  4. 또 뭐 항상 그렇듯 지나치게 좌파적이고 현실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을 것이고, 분배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계급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을 것이고.

Links
  1. Tyler Cowen and Veronique de Rugy, Why Piketty’s Book Is a Bigger Deal in America Than in France, April 29, 2014, New York Times.
  2. Clea Caulcutt, France Is Not Impressed with Thomas Piketty, April 28, 2014, Foreign Affairs.

2014년 4월 26일 토요일

거울아, 거울아 누가 가장 공정하니...

우리말에 꼴값이란 게 있다. 얼굴값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는데, "아주 꼴값을 해요"라는 말은 "생긴대로 논다" 아닐까 싶고, 조금 오바하자면 "외모로 그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그런 뜻 정도로 이해한다. 그런데 스탠포드 경영대학의  Peter Belmi와 Margaret Neale은 본인 스스로 생각하는 꼴값과 불평등에 대한 태도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분석을 시도하였다 (Mirror, mirror on the wall, who’s the fairest of them all? Thinking that one is attractive increases the tendency to support inequality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124 (2014) 133–149.)

1. 방법

이들은 다섯 가지 유사한 방식으로 인터넷 설문 조사를 했는데, 조사한 항목은 본인의 육체적 매력도(self-perceived attractiveness),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계층(subjective social class), 그룹차별성향 (group-based dominance 어떤 그룹은 다른 그룹에 비향 열등하다등의 항목에 대한 지지정도), 정당화 이데올로기 (legitimizing ideologies 여성과 소수자들이 낮은 임금을 받는 것은 숙련이나 교육수준이 낮아서다, 미국에서는 누구나 성공할 기회를 동등하게 갖고 있다 등에 대한 지지정도), 불평등의 원인에 대한 평가 (개인성향론dispositional - 능력/재능/근면/자산관리 등등 v. 사회적요인론contextual - 차별/편견/상속/정책 등등), Occupy 운동에 기부금을 낼 의향 등이었다.

그리고 인구학적 요인들, 인종/연령/성별/교육수준 등은 통제하였다.

2. 발견

자신이 매력적으로 생겼다고 생각할 수록, 스스로를 상위계층으로  생각하였고, 그룹차별성향이 강했으며,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다. 그리고 불평등의 원인에 대해서 개인성향론으로 설명하려는 성향이 강했고, 기부금을 낼 의향은 낮았다.

Click the image for higher resolution. Source: Belmi and Neale (2014).

또한 스스로의 매력도 평가에 앞서, 세 그룹으로 나누어 1그룹(매력조건그룹)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육체적으로 매력적이었던 순간을 적어보시오"라고 하고, 2그룹(비매력조건그룹)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육체적으로 매력적이지  못했던 순간을 적어보시오"라고 하고, 3그룹(통제그룹)은 "가게에 갔던 경험을 적어보시오"라고 하고, 조사를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매력조건그룹은 통제그룹에 비해 자신이 매력적이다라고 생각하는 정도가 강해졌고, 비매력그룹은 통제그룹에 비해 자신이 매력적이다라고 생각하는 정도가 약해졌다. 그리고 그 뒤의 얘기는 동일하고. 

그러니까, 잘 생겼던 시절을 상기시키는 것 만으로도 그 인간을 평등에 반대하는 성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

끝으로 스스로의 육체적 매력도 외에, 스스로의 사회적공감도(emphathy)나 진실성(integrity)에 대해서도 평가하게 했는데, 이것은 불평등에 대한 위의 온갖 내용들과 유의하게 상관이 있는 것으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3. 소감

뭔가 치밀한 분석은 아닌 느낌........이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그리고 나의 이 높은 self-perceived attractiveness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에 대한 tolerance가 매우 낮은 성향은 exceptionally noble한 것인가 하는.......쿨럭, 쿨럭... 

2014년 4월 19일 토요일

United States of $$$

얼마전 타계한 Robert Dahl은 1961년 저서 Who Governs의 첫 문장에서 "모든 성인이 투표할 수 있는 나라, 하지만 지식, 재산, 사회적신분, 관료와외 관계 등 모든 자원이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나라, 과연 이런 나라는 누가 지배하는걸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경제적 소득과 재산 분배가 극심하게 양극화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민주주의 이론도 다시 생각해야하는 것일까? 두 정치학자 Martin Gilens (Princeton)와 Benjamin I. Page(Northwestern)가 다소 이례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에 도전하였고, 그 결과물 "Testing Theories of American Politics: Elites, Interest Groups, and Average Citizens"이 조만간 Perspectives on Politics에 게재된다고 한다. (Link for the public access PDF version) 미국의 여러 매체에서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우리한테도 시사점이 있는 듯.

1. Four Theories

이들에 의하면 이 주제에 대해서는 네가지 이론적 대안이 존재한다고 한다.

  • Majoritarian Electoral Democracy 평균적인 시민이 지배한다.
  • Economic Elite Domination 부자가 지배한다.
  • Majoritarian Pluralism 이익단체가 지배한다.
  • Biased Pluralism 이익단체 일반이 아닌, 재계 이익단체가 지배한다.

2. Data

이런 여러 이론들에 대해서 지지하고 반박하는 수많은 실증연구가 있는데, 이들은 과감하게 통합 테스트를 시도했다. 이들은 우선 정책에 대한 계층별 선호를 조사하기 위해 1981~2002년간 미국에서 전국적으로 시행된 정책에 대한 태도를 묻는 서베이 중 다음 조건을 만족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 연방정부 정책 대상 (주정부사항,  헌법개정사항, 대법원판결사항 제외)
  • 찬성과 반대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들 (집계가 쉬어야)
  • 응답자의 소득에 관한 항목을 포함할 것 (계층별 분석을 목표로)
  • 정책의 채택 여부를 추적할 수 있는 것들 (이게 결과니까)

이렇게 집계된 것이 총 1,779 건으로, 이 건들의 설문결과를 하나하나 코딩해서(오, 불쌍한 조교들!), 기초 도구로 삼았다. 그래서 저소득층 (소득 하위 10%), 중간층 (중위소득자), 고소득층 (소득 상위 10%) 각각이 각 정책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를 알아냈다.

다음으로 이익집단의 태도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주요 이익집단을 선정하는 작업부터 했는데, Fortune 지 선정 주요 이익집단 (Power 25) 리스트를 기반으로 해서, 지출액이 큰 10대 산업단체를 포함했다. 그리고 분석 대상인 1,779건의 정책 각각에 대해 이들 집단이 어떤 태도를 갖는지 각종 자료를 뒤져서 "강한지지", "다소지지", "다소반대", "강한반대"를 부여하였다 (오, 다시 한번 불쌍한 조교들). 그래서 이익집단의 각 정책에 대한 선호도(Net Interest Group Alignment)를 다음과 같이 계산하였다.

NIGA = ln(강한지지수 + [0.5 * 다소지지수] + 1) - ln(강한반대수 + [0.5 * 다소반대수] + 1) 

마지막으로 이들 정책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신문, 정부자료, 의회관보, 학술지 등을 다 뒤졌다 (아, 정말로 불쌍한 조교들!!)

3. 결과

우선 중위소득자의 선호, 고소득자의 선호, 이익집단의 선호 세가지를 독립변수로 해서 정책 채택율을 봤더니, 중위소득자의 선호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들이 선호한 정책이 채택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많이 채택되긴 했는데, 고소득자나 이익집단의 선호와 연동이 될 때만 채택). 반면에 고소득층의 선호와 이익집단의 찬성/반대 여부 (NIGA)는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Click the image for the full size picture. Source: Gilens and Page (2014)

그러니까 위의 설명대안 중에서, 적어도 이 자료는 Majortarian Electoral Democracy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Business Elite Dominance와 Interest Group Dominace는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익단체의 영향은 대중단체(AFL-CIO 등)와 재계이익단체(NRA 등)의 영향은 차이가 있을까 하는 문제에 도전했는데, 두가지 범주로 이익단체를 구분해서 NIGA를 계산해서 분석했더니 대중단체보다 재계이익단체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컸다. 그래서 단순한 Majoritarian Pluralism보다는 Biased Pluralism이 작동한다는 것.

Click the image for the full size picture. Source: Gilens and Page (2014)

4. 소감

요즈음 불평등에 대한 연구가 경제학자들의 고립적인 연구에서 점차 벗어나, 경제학-심리학-정치학-교육학-보건학 등 여러 분야의 융합으로, 이론-실증-역사의 다 층위로 확장되는 경향이 뚜렸하다. 그리고 단순히 아카데미아의 논의가 아닌 현실의 정책/정치의 영역과 그대로 연결되는.

Gilens and Page의 이번 연구는 진짜 단순무식하다할 정도로 "노동집약적"인 연구인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일부 억지스러운 것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발견에 의해 기각되거나 수정되는 것도 있겠지만, 중요한 돌파구를 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과 이것이 각고의 노력으로 입증되는 것의 차이랄까. 요즘 젊은 한국의 사회과학자들도 분배에 관한 여러 측면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고, 흥미로운 연구성과들이 나오고 있다는데, 좀 더 관심갖고 찾아봐야할 듯.

참 Robert Dahl의 현대 정치학에 미친 영향은 엄청난 듯. 내가 무식하여 작년 최장집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시고 설명해주시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는데, 요즘의 정치학 논문도 시도 때도 없이 달의 연구성과를 인용하고 있으니. 그리고 Martin Gilens의 역작 두 편 중 Why Americans Hate Welfare (1999)는 <왜 미국인들은 복지를 싫어하는가>로 번역되어 있지만, Affluence and Influence (2012)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 이 책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 책인 듯. 뜻있는 출판인이 나서주길 기원.

PS (April 27, 2014) > 중앙SUNDAY에 압축적인 만평이 실려서 소개


PPS (May 22, 2014) > Economist Magazine에 Gilens and Page의 논문 소개가 실렸는데, 이 기사에서 의외인 것은 Economist지도 부자들이 지나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Economist지 다운 것은 지나친 영향력의 문제를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풍이 불어 금융부분 뿐만 아니라 경제전체에 해로운 포퓰리즘 정책이 도입될까하는 데서 찾는 것.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Maximum Wage

소득분배 불평등이 커지는 것에 대한 여러 해법 중 하나로 최저임금을 인상하자는 것이 있다면, 대칭적으로 최고임금을 제한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작년에 스위스에서 최저임금과 최고임금 사이의 격차를 12배 이내로 제한하자는 국민투표가 있었고 이것은 비록 부결되었지만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제네바에 거주하는 ILO 이코노미스트 이상헌이 <한겨레 21>에 소개한 기사를 통해 생생하게 현장의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

그런데 Danielle Kurtzleben의 최근 Vox 기사(The law that failed to curb CEO pay, thanks to the biggest loophole ever)를 통해, 스위스와는 다르지만 미국에도 최고 임금을 제한하는 수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클린튼의 세법개정을 통해 입법화된 규정(26 U.S. Code § 162(m))인데, 미국 상장기업의 경우 CEO 또는 최고보수를 받는 4인 임원 각각의 연보수가 백만불을 넘을 경우, 이 초과분에 대해서는 손금인정을 해주지 않는 규정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최고임원진의 보수를 제한하는 인센티브를 회사에 주는 것이기도 하고, 이를 넘어서면 연방정부 세수가 늘어나는 효과가 기도 한 그런 규정.

그런데 함정이 하나 있어서 생각했던 효과를 제대로 내지는 못했다고, 연간보수를 계산할 때 성과급 부분은 제외하는 것으로 해서 대개의 경우 이 규정을 피해나간다고 한다. Economic Policy Institute의 추계(PDF)에 의하면, 이 규정이 도입되어 연간 법인세를 $2.5bn 더 겆게되었지만, 성과급 예외때문에 연간 $7.5bn의 세수는 놓치고 있다고 한다. 이 함정을 메우려는 입법시도는 있지만 통과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한다.

내가 소심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스위스에서 시도한 최고임금 지정방식보다는 특정 금액을 초과하는 임금에 대해서 손금불산입하는 방식이 더 끌리는데, 관심을 갖고 더 생각해 볼만.

2014년 4월 10일 목요일

사실과 논리로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보론)

며칠 전 Ezra Klein이 Dan Kahan의 실험에 대한 기사를 Vox에 실었고, 약간의 여진이 발생. 기왕에 나도 소개를 했던 입장에서 조금 더 나가보면...

1. Asymmetric Stupidity by Paul Krugman

크루그만은 자신의 NYT 블로그에 Asymmetric Stupidity라는 짧은 포스팅을 했는데,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정상적인 사고가 저해되는 경향은 리버랄과 보수 사이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보수에서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Klein에 대해 약간의 불평을 하였다. 이 때 예로 든 것이 보수주의자들이 기후변화에 대해 부정하거나, 2012년 오바마가 롬니를 앞서고 있다는 여론조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거나,  오바마케어가 실제 미보험자의 커버를 높일 것을 부인하는 것 등에 필적하는 리버럴의 극단적인 Stupidity가 없지 않냐는 것.

2. Dan Kahan's Critique of Paul Krugman

실험의 원 설계자인 Kahan에 의하면,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는 인식의 검증은 증거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대한 것이지, 옳은 답을 얻었느냐 여부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리버럴들이 우연히 정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들의 사고가 더 high quality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것을 입증하려면 보수와 진보가 각각 증거를 앞에 두고 진실과의 관련 속에서 사고를 진행시키는지 아니면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전제와 가까운가 여부를 갖고 증거를 버리거나 채택하는지를 테스트해야 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이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리버럴 Krugman은, 진실로 liberal-conservative 사이에서 stupidity가 symmetric하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비아냥을...

3. The WSJ hates Paul Krugman as usual

이런 일에 뒷짐을 설 WSJ이 아니다. 크루그만이 예로 든 비대칭성의 사례에 대해 조목조목 WSJ의 입장에서 비판을. 비판 내용이야 보시면 알 것이고, 오히려 오래된 기시감이 든다. 십수년전에 WSJ은 온라인 판에서 자신이 보기에 엉터리 주장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Stupidity Watch라는 제목으로 공격을 했었는데, 하도 Paul Krugman에 대한 공격이 많아지자, 아예 Paul Krugman Watch라는 독립된 시리즈를 한동안 계속했다. 그리고 그 때 MIT 경제학교수인 Krugman이라는 소개 대신, 항상 "전직 엔론사 고문 Paul Krugman"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했는데, 이번에도 또 그 타이틀을.

4. 소감

나는 지난번 포스팅에서 그래도 나는 과학과 논리, 다수결의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 인간의 사고에 대한 궁극의 신뢰를 표현하면서 근대적 인간이라고 썼는데, 홍성욱 교수가 댓글에서 본인은 나와 정반대로 생각하신다면서 본인은 뼛속 깊숙이 탈근대인인 것 같다고 하셨다. 아 근데 정말 이 후속담들을 보니, What the H***. 나도 홍교수 쪽에 끌린다. ㅠㅠ.

2014년 4월 9일 수요일

사실과 논리로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오늘 오래간만에 전철로 퇴근. 전철 안에서만 한시간이라 이런 저런 웹서핑을 하면서 집에 오는데 (아, 나도 안다. 이런 귀한 시간을 얻었을 때는 책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게 보내는 것이라는 것을. 허나 어쩌랴 전철을 타고 보니, 손에 책 한권 없고 있는 것은 딸랑 스마트 폰 뿐), 특별히 눈에 띄는 두편의 글이 있어서 같이 정리해 둔다 (사실 두 편이 잘 엮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는데, 뭐 일기장 비슷한 블로그니 내 맘대로).

1. Information Matters

세명의 정치학자가, Kyle Dropp (Dartmouth), Joshua D. Kertzer (Harvard) and Thomas Zeitzoff (Princeton), 3월말에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미국인 2천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수행했는데, 그 결과가 상당히 흥미롭다.

우선 설문의 가장 핵심은 "당신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지지하는가'라는 것인데, 이러한 견해를 형성하는 요인들을 파악하기 위해 통상적인 인구학적 항목들을 조사했다: 나이, 성별, 학력, 민주당/공화당 성향 등등.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하나의 특이한 항목을 추가했는데, 화면상에 고해상도 세계지도를 보여주면서, 우크라이나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마크를 하게했다. 그 결과가 아래의 지도다.

Click the image for the full size picture. Source: Dropp-Kertzer-Zeitzoff (2014)

동구의 정확한 지점에 마크한 경우는 대략 16%였고, 전반적으로는 정확도가 매우 낮아서, 실제 위치와 마크와의 차이의 (이를 편의상 오차거리라고 하자) 중위값은 대략 1,800 마일이었다. 소그룹별로는 보면 예상대로 젊은이가 노인보다 정확했고 (27% v. 14%), 남성이 여성보다 정확했고 (20% vs. 13%) 대졸자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정확했다 (21% v. 13%). 반면에 약간 특이한 것은 군인가족과 비군인가족이 정확도에 차이가 없었으며, 정치적 성향으로는 무당파(29%)가 민주당파(14%)와 공화당파(15%)를 압도했다.

이들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은 오차거리와 군사적 개입의 지지도 사이에 뚜렷한 관계가 있다는 것으로, 우크라이나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 부정확하게 알수록, 군사적 개입을 지지하였다. 이것은 일반적인 외교관점이나 인구적 특성을 다 콘트롤해도 95% 신뢰구간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했다. 군사적 개입이 미국의 국익에서 반드시 바람직한지 여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정보가 확대될수록 의사결정이 군사적 비개입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See. Kyle Dropp, Joshua D. Kertzer and Thomas Zeitzoff (2014), The less Americans know about Ukraine’s location, the more they want U.S. to intervene, in The Monkey Cage Blog.

2. Identity-Protective Cognition

내가 최고의 저널리스트로 꼽는 Ezra Klein이 Yale의 법학/심리학 교수인 Dan Kahan이 이끄는 팀의 정보와 당파성에 관한 실험 결과를 소개하는 기사를 썼다. 사실 이 실험은 나도 작년 가을에 짧게 페이스북에 소개한 바 있는데, 이 기사는 무엇보다 Kahan과의 인터뷰를 포함하고 있어서 생각할 거리를 폭넓게 던지고 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정리.

Kahan은 Erica Cantrell Dawson (Cornell), Ellen Peters (Ohio State), Paul Slovic (U. Oregon)과 함께 미국인 1천여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수행하였다. 우선 기본적인 문제들을 풀게 해서 각 대상자들의 수리능력을 0~9점까지 부여하였고, 정치적 성향을 조사해서 강진보, 약진보, 중도, 약보수, 강보수의 5단계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가상의 실험 결과를 해석하게 하였다.

Click the image for the full size picture. Source: Kahan et al. (2013)
"새로운 연고를 사용한 사람은 사용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확률적으로 피부가 더 좋아진다/나빠진다" 중에서 답해야 하는데, 좋아진 사람 중에서 새 연고를 사용한 사람이 223명이고,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 107명이니 연고를 사용한 사람이 좋아질 것이다라고 답하면 함정에 빠진 것이고, 연고 사용자의 74.8% (=223/(223+75))가 좋아지고, 사용하지 않은 사람 중의 83.6% (=107/(107+21))가 좋아지니, 사용하는 것이 사용하지 않는 것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나쁘다라고 해석하는 게 정확한 답이다.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위의 표의 Rash Got Better와 Worse를 바꿔서 동일하게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아서 대체로 수리능력 점수가 높을수록 여드름 실험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비율이 높았다.

Click the image for the full size picture. Source: Kahan et al. (2013)

여기까지만 보면, "이토록 단순한 문제도 못풀다니, 우리 나라의 교육은 큰 문제, 운운"하는 비분강개에 쓰이고 말텐데, 이들은 약간의 변형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위의 가상의 여드름 실험은 특별히 당파적인 이슈는 아닌데, 이번엔 똑 같은 숫자를 주고, "새로운 연고를 썼더니 여드름이 개선/악화되었다"가 아니라, "새로운 총기규제를 했더니 범죄가 줄었다/늘었다"로 문항을 빠꾸어서 일군의 집단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 전체적 결과는 여드름 치료와 별로 다르지 않아서, 대체로  이 문제에 대해서도 수리능력 점수가 높을수록 정확하게 해석을 했다.

Click the image for the full size picture. Source: Kahan et al. (2013)

그런데 이 정답/오답율을 진보와 보수로 구분해서 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발견되었다. 우선 여드름 연고에 대해서는 각 정파별로 특별한 패턴차이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총기규제에 대해서는 범죄가 줄어드는 사례에서는 수리능력이 높아질 수록 진보파는 급격히 정확도가 높아졌지만, 보수파는 거의 정확도 개선이 없었다. 반대로 범죄가 오히려 늘어나는 사례에서는 정확히 반대의 패턴이 발생했다.  더 아픈 발견은 수리능력이 낮은 집단에서는 보수파와 진보파의 해석차이가 조금 발생하는데, 수리능력이 높은 집단에서는 보수파와 진보파의 해석차이가 오히려 더 심각해 진다는 것이다.

Click the image for the full size picture. Source: Kahan et al. (2013)

이들은 충분한 증거가 있음에도 대중적 논쟁이 해결이 되지않는 것을 설명하는 두가지 설명틀을 제시하는데, 첫째는 Science Comprehension Thesis로 대중의 지식이나 논리력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Identity-protective Cognition Thesis로 문화적 갈등이 정상적이 사고를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Kahan 등의 이 실험은 그 자체로서 SCT에 대한 강력한 반증을 제공한다. 당파성을 강하게 갖는 주장은  사회의 논리력이 더 높아질수록 오히려 논쟁의 간극이 더 커진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ICT에 의하면, 인간이 자신이 속한 정치적 집단의 생각과 다른 것을 주장할 때 정체성의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데, 현대 미국 정치에서 이 위기감이 점차 커지고 있고, 적어도 이 실험은 이 ICT에 더 부합한다.

See. Dan Kahan et al.  (2013) Motivated Numeracy and Enlightened Self-Government (PDF), Yale Law School Working Paper, and Ezra Klein (2014) How politics makes us stupid, in Vox.

3. 몇가지 소감

미국 정당정치가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더 양극화되고, 언론도 (Fox와 MSNBC), 유권자도 다 양극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예전에도 페이스북에 한번 포스팅한 바 있지만, The National Journal2012년 미국 상원의 양극화 보도는 의미심장하다.

Click the image for the full size picture. Source: The National Journal. (2013)

윗줄의 왼쪽부터 순서대로 보수지수가 높은 것이고, 테두리가 빨간 인물은 공화당, 파란 인물은 민주당 소속이다. 정확히 공화당이 끝나는 지점에서 민주당이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 어떤 진보적인 공화당 상원의원도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보다 더 보수적이다. (에구, 그런데 이것이 미국 정치학계에서는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는데, 내 주변에서는 오히려 너무 당연하다는 반응. "아니 새누리당 의원보다 더 보수적인 꼴통이 새정치민주연합에 있다는 게 말이 되!" 또는 "새정치 민주연합 의원보다 더 빨갱이같은 새누리당 의원은 솎아내야")

다음으로 이러한 ICT가 보편적인 것이냐, 아니면 예외적인 것이냐라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Kahan은 자신의 실험발견을 지나치게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다. 나도 그런 축인데, 여기서 맥락에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스스로를 근대적인 인간인라고 생각한다. 여러가지 풍파가 있고, 아노말리가 있고 하겠으나,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를 신뢰하는 것, 논리, 과학, 증거가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것, 인간의 사고능력은 결함투성이이지만 궁극에는 합리적인 측면이 더 우월하다는 것, 뭐 그런 것을 믿는다. 그런 믿음이 없으면 정치를 뭐하러 하겠는가.

그리고 미국에서 정치적 양극화 설명에서 중요한 것이 소위 문화전쟁(Cultural War)인데, 우리에게는 그런 계기가 되는 측면은 역사전쟁이 아닐까 싶다. 내 아버지 세대는, 전쟁의 비참함과 빈곤에서 탈출한 자랑스런 역사를 스스로 만들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우리 세대는 개인적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군사독재와 싸워서 민주화를 이뤘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고, 둘 사이에는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고. 나도 아버지와 이 주제는 서로 피하니까, 이 영역에서는 적어도 상당기간은 ICT가 압도할 듯. 좌우간 쉬운 일은 아니다.

2014년 4월 5일 토요일

스트라이크와 볼 그 체계적 오심.

요 며칠 사이에 메이저리그 경기의 스트라이크와 볼의 판정에 대한 두건의 분석이 New York Times (March 30)와 FiveThirtyEight (April 3)에 기사화되었다. 두건 다 프로페셔널 경영학자들의 논문을 대중적으로 소개한 것인데, 그 자체로 흥미롭기도 하고 사실 예전에 유사한 소개를 포스팅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차일피일하다가 미루었던 것도 있고 해서, 이번 기회에 간단하게 요약 정리해 둔다.

1. 백그라운드

공식적인 스트라이크 존은 횡적으로는 홈플레이트의 좌우경계를, 종적으로는 어깨/허리의 중간선과 무릎선으로 구성되는 직사각형의 영역이다.

Source: Strike Zone in Wikipedia.

문제는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지 않은 공이 스트라이크로 잘못 판정되거나(Over-Recognition), 반대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한 공이 볼로 잘못 판정되는 경우(Under-Recognition)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니,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오심은 어느정도 자주 일어나는가하는 것과, 이러한 오심이 어떤 경향성을 띄는가 하는 것이 관심의 영역이다.

이 오심에 대해선 야구 초창기부터 수많은 예상과 억측이 있었는데, 메이저리그에서는 2007년부터 Pitch f/x라고 해서 정밀 카레라를 통해서 모든 투구를 1cm 이내의 오차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몇년간 쌓여서 엄청난 양이 축적되었고, 이를 이용한 다양한 분석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모든 분석과 기사는 다 이 Pitch f/x 자료를 이용한 것들이다.

2. 투수의 지위 (Status of Pitcher)

콜롬비아 경영대학의 김원용 교수와 켈로그 스쿨의 Brayden King 교수의 "Seeing Stars: Matthew Effects and Status Bias in Major League Baseball Umpiring" (forthcoming Management Science, Link for Downloadable Working Paper in PDF)는 투수의 지위가 심판의 스트라이크/볼 판정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분석한 것이다. 저자들은 이 논문을 요약해서 New York Times"What Umpires Get Wrong"이라는 기사로 실었다.

이들은 투수의 지위를 측정하는 변수로 과거의 올스타전 참여 횟수를, 제구력이 높은 투수라는 명성을 측정하기 위해서 과거의 사구 (base-on-balls) 허용율을 선택했다. 그리고 홈경기 여부, 관객수, 투수의 메이저리그 참여연도 등 다양한 변수를 콘트롤하였다. 핵심 결론은 투수의 지위가 높을수록 주심은 투수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

우선 Over-Recognition을 살펴보자.

Source: King and Kim (forthcoming)

세로축은 over-recognition의 확률이고, 가로축은 사구 허용율이다. 그림에서 보듯 올스타전에 참가한 경험이 많을수록 실제 투구가 볼이었음에도 스트라이크로 판정을 받아낼 가능성이 컸다. 다만, 사구 허용율이 높은 투수들 사이에서는 올스타전 참여 여부가 유리하게 작동하는 효과가 사라졌다. 결국 투수가 제구력이 높다고 알려져있고, 올스타전에 참여한 경험이 있을 때, 매우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Under-Recognitiond을 살펴보자.

Source: King and Kim (forthcoming)

이 차트의 세로축은 under-recognition의 확률이고, 가로축은 실제 투구가 스트라이크 존의 경계에서 얼마나 떨어졌는가를 측정한 것이다. 그러니까 왼쪽에 있을 수록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한 것이고, 오른쪽으로 갈 수록 스트라이크 존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이번에도 over-recognition만큼은 아니지만, 올스타전에 참여한 경험이 많은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던지고도 볼로 판정을 받는 억울한 상황에 처할 확률이 낮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차이는 경계선 상에서 아슬아슬할 때 유리하게 작동했고, 스트라이크 존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공은 지위가 높은 투수건 그렇지 않은 투수건 스트라이크로 판정될 확률이 극히 낮았다.

3. Impact Aversion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생인 Etan Green과 David P. Daniels는 지난 2월 개최된 제8차 MIT Sloan Sprots Analytics Conference에서 "What Does it Take to Call a Strike? Three Biases in Umpire Decision Making" (Downloadable Paper in PDF)이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이를 요약해서 FiveThirtyEight"Four Strikes And You’re Out"으로 기고하였다. 이 논문의 핵심은 현재의 볼카운트가 주심의 스트라이크/볼 판정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일단 출발점으로 아래의 차트를 먼저 보자.

Source: Green and Daniels (2014)

이 그림의 vertical axis라고 하는 축은 스트라이크 존의 세로방향, horizontal axis라고 하는 것은 가로방향을 의미한다. 붉은 색 라인이 실제 스트라이크 존이고, 0은 스트라이크 존의 중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차트의 높이는 스트라이크로 판정을 받을 확률로 붉은 색은 1에 가까운 것이고, 푸른색은 0에 가까운 것이다. 그림에서 보듯 실제 스트라이크 존의 외부로 갈수록 푸른색이 짙어지고, 스트라이크 존의 한가운에로 가면 붉은 색이 짙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 이제 3-볼인 상태여서 볼 하나가 추가되면 사구로 되는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때도 주심은 평상시와 동일하게 판정을 할까? 만약 그렇다면 3-볼인 상황에서의 차트도 위의 차트와 동일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 데이터로 그려보면, 다르게 나타난다. 아래 그림은 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Source: Green and Daniels (2014)

이 차트의 높이는 대체로 0 또는 양의 값을 갖는데, 그 의미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일반적인 상황에 비해 3-볼인 상황에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더 받게 될 가능성이다. 차트 아래쪽에 붉은 색 사각형이 스트라이크 존인데 존의 경계에서 특별히 그 값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주심은 3-볼인 상황에서 평상시보다 더 스트라이크를 남발하는데, 경계에서 확실히 벗어나서 누가 봐도 볼이거나, 한가운데 들어와서 분명이 스트라이크거나 한 경우는 차이가 거의 없지만, 경계상에 애매할 때는 평상시보다 더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이것과 대칭적인 상황은 2-스트라이크인 경우로, 이때는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으면 삼진 아웃된다. 이 때는 위와 정반대로 심판은 스트라이크 판정을 매우 엄격하게 한다.

Source: Green and Daniels (2014)

이번에는 차트의 높이가 대체로 0 또는 그 이하의 영역이다. 차트 윗부분의 붉은색으로 표시된 스트라이크 존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번에는 완전히 벗어나거나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분명한 경우는 일상적인 상황과 2-스트라이크 상황이 차이가 없지만, 경계에 있을 때는 2-스트라이크인 상황에서 스트라이크 판정은 평상시보다 낮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관객이 기대하는 바, 그리고 심판들도 받아들이고 있는 바, "경기가 심판에 의해서 결정되어서는 안된다"라는 암묵적인 어떤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2-스트라이크인 상황에서 오심으로 스트라이크를 볼로 판정해도 큰 반발은 없겠지만, 오심으로 볼을 스트라이크로 판정해서 선수가 아웃이 된다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다 (심판이 결정했다!). 3-볼인 상황은 정확히 반대이고. 그래서 심판은 자신의 판정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Impact Aversion) 스트라이크/볼 판정을 할 때 현재의 볼카운트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impact aversion에 대한 분석은 이번에 처음 수행된 것이 아니다. Tobias J. Moskowitz가 2011년에 출간한 Scorecasting에도 이것과 거의 유사한 분석이 등장한다. 다만 차트 표현만 다를 뿐. 이것을 살펴보자.


Source: Moskowitz (2011)

여기에서 직사각형 영역이 공식 스트라이크 존이다. 그리고 둥그런 부분은 현실의 스트라이크 존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데, 해당 영역에 공이 들어왔을 경우 50% 이상 실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은 영역이다. 안쪽의 빗금 친 영역은 2-스트라이크인 상황이고, 바깥의 큰 원은 3-볼인 상황이다. 두 영역의 차이인 색칠을 한 도넛 부분을 해석하자면, 여기에 공이 올 경우 2-스트라이크인 상황이라면 볼로 판정을 받을 확률이 50% 이상이고, 반대로 3-볼인 상황이라면 스트라이크로 판정을 받을 확률이 50% 이상이다라는 것.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Green-Daniels의 3-dimensional heat map과 Moskowitz의 평면도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거의 같은데, 전자가 훨씬 팬시해보이긴 하지만, 오히려 설명하기 더 어려운 듯. 나 개인적으로는 과거에 Moskowitz의 책을 읽은 바 있고, Pitch f/x가 뭔지 익숙한 상황이니까 Green-Daniels의 글이 쉽게 이해가 갔지,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몇번을 갸우뚱 했을 듯. 좌우간 차트의 핵심이 "멋져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

4. 그리고....

야구에서 비디오 판정이 확대되고 있지만, 스트라이크와 볼의 판정은 전적으로 주심의 육안판정에 의존한다. 이 이유는 뭘까? 잘 모르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현재도 매 투구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실 투수가 공을 던지고 공이 홈플레이트를 지나는 순간 심판은 그냥 멀뚱히 서있고, 기계판정에 의해서 보드에 스트라이크/볼이 표시되고 이것을 장내 아나운서가 선언하는 것은 현재 기술로도 그냥 가능한데.

인간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심도 게임의 일부라는 옛 경구 때문에?

2014년 4월 4일 금요일

인터넷과 탈종교?

미국 인구 중 "종교없음"에 속하는 비율이 1990년대까지는 수십년간 5~8% 수준이었는데, 그 이후 지속적으로 상승해서 지금은 거의 20%에 근접. 이 퍼즐을 풀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는데, 최근 올린 공대의 컴퓨터 과학자 알렌 다우니가 이색적인 주장을.


위의 그림 아래쪽의 붉은색 선이 앞서 말한 "종교없음" 인구의 비율인데, 위쪽의 파란색선은 전체 인구중 인터넷을 사용하는 인구의 비율로 두 선은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데이터는 시카고 대학의 General Science Survey을 이용.

"종교없음" 인구 증가의 25% 정도는 종교적 환경에서 자란 비율의 감소로, 5%는 대학교육을 받은 인구의 증가로, 그리고 25%는 인터넷 인구의 증가로...나머지는 unexplained로...결론.

이런 주장을 보면 누구나 "Correlation does not imply causation!"가 떠오를텐데, 알렌 역시 이 문제를 스스로 제기하면서 답하길, 1) 논리적으로는 인터넷 사용의 증가는 새로운 정보의 증가, 인적 네트워크의 다양화이므로 좁은 종교적 코뮤니티의 영향 감소이고, 이에 따라 "종교없음"이 늘어날 수 있다 2) 반대편 인과, 그러니까 "종교없음" 인구증가가 인터넷 사용증가를 초래했다고 보기는 더 어려운 것 아닐까? 3) 다른 많은 변수들을 콘트롤해도 여전히 이 효과가 지속이라는 세가지 논거로 자신의 주장을 계속 펼치는데...

글쎄, 나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Correlation does not imply causation라는 생각이약해지지 않는다. 온갖 반대쪽 생각들을 할 수도 있을 듯. 1) 종교가 없던 인간이 인터넷으로 특정종교에 빠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인터넷은 각 종교의 중요한 선교수단이다), 2) 종교가 없어진 인간이 교회가던 시간을 벌게되어, 인터넷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고, 3) 그리고 콘트롤 변수를 늘리는 것이 인과와 상관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된다는게 natural experiment 진영 사람들의 기본 입장인 듯하고....

- Fulltext는 ArXiv에서 http://arxiv.org/abs/1403.5534
- 이 논문에 대한 소개는 MIT Tech Review에서 http://a.to/14MifxO

2014년 2월 26일 수요일

Positive Assortative Mating and Income Inequality

자존심 강하고 총명하며 사랑의 소중함을 믿는 엘리자베스 베넷은 일견 오만하지만 신중하고 사려깊은 미스터 다아시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으니, 한발만 잘못 디뎠으면 엘리자베스는 비열한 하급장교 위컴과 맺어질 뻔했고, 다아시는 술수에 능한 캐서린 공작부인의 딸과 결혼하였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200년동안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아 왔는데, 조금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이들의 결혼은 소득분배의 측면에서도 매우 바람직했다. 가문도, 인척도, 재산도 없는 엘리자베스 베넷이 연소득 1만파운드인 거부와 맺어지지 않고, 그보다 훨씬 가난한 위컴과 결혼하였다면, 또 반대로 미스터 다아시가 가난뱅이 아가씨가 아닌 자신과 비슷한 부자인 캐서린의 딸과 결혼했다면, 결혼이라는 것은 부자는 더 부자로, 가난뱅이는 여전히 가난뱅이로 만드는 기제였을 터.

이렇듯 소득분배에서 결혼이 차지하는 영향이 작지 않을텐데, 우리시대의 결혼방식은 분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긴 경제학자들이 있었으니, Jeremy Greenwood, Nezih Guner, Georgi Kocharkov and Cezar Santos (GGKS)가 이에 대한 분석을 시도. VOX에 실린 이들의 포스팅에서 시작해보자.

1. Assortative Mating Changes

우선 결혼이 비슷한 부류끼리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신분을 뛰어넘어서 이루어지는지 측정하기 위해서 이들은 개인의 교육수준을 고퇴이하/고졸/대퇴/대졸/대학원졸 다섯단계로 구분하고, 센서스 자료를 이용해서 남편의 교육수준과 아내의 교육수준을 비교해서 남편의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는지를 측정했는데, 이것을 Kendall's tau (τ) 로 표시.

Source:  VOX Figure 1. The rise in assortative mating

단순하게 변화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상승하고 있고, 이들이 관심을 갖는 두 시점인 1960년과 2005년을 비교해보면 τ로 측정한 끼리끼리 결혼지수는 분명히 상승

2. Income Inequality Changes

관심을 갖고 있는 두 시기의 소득분배 상태를 비교해 보면, 로렌츠 곡선이 대각선에서 멀어질수록 또는 지니계수가 클수록 분배가 악화된 것인데, 아래 그림에서 보듯 1960년에 비해 2005년에 소득불평등이 심화.

Source: VOX Figure 2. Income inequality, 1960 and 2005

3. Mating Effect on Inequality

이제 이 둘을 결합할 시기인데, 여기에서 필자들의 재치가 반짝. 우선 이들은 결혼이 교육수준과 무관하게, 무작위적으로 이루어졌으면 소득분배가 어떻게 될까를 계산했더니, 1965년에는 실제값과 거의 차이가 없었는데, 2005년에는 아래 왼편 그림에서 보듯 큰 차이가 발생 (실제 지니계수는 0.43인데, 무작위적으로 결혼을 하였다면, 지니계수가 0.34).

Source: VOX Figure 3. The effects of assortative mating on inequality

다음으로 무작위적인 결혼이 비현실적이니, 방법을 바꾸어서 끼리끼리 결혼 패턴이 1960년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소득분배는 어떻게 될까를 계산. 이것이 위 오른쪽 그림인데 이렇게 계산하면 지니계수가 0.35로 이런 가상의 상황도 현실과 뚜렷이 분배차이가 발생.

4. Lawrence Mishel's Critique

진보적 씽크탱크인 Economic Policy Institute의 Lawrence Mishel은 위 연구결과를 비판하였는데, "보수 논객들이 GGKS에 근거해서 분배의 악화는 경제적 성과를 나누는 방식의 변화때문이 아니라, 인구적 요인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주장하게 될 턴데, 이는 위 연구가 잘못된 설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제일 위의 그림에서 보듯 끼리끼리 결혼지수인 τ를 1980년 이후로 잘라서 보면, 대체로 하락하는 것이고, 실제로 분배의 중요한 악화가 발생한 것이 이 시기이므로, 1980년과 2005년을 비교하여야 한다는 것.

그래서 GGKS의 논거를 그대로 활용하면, "1980년에 비해 2005년은 결혼방식의 변화는 소득분배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실제 분배는 악화되었다. 그러니 이 시기의 경제적 성과를 나눠갖는 기제가 얼마나 심각하게 악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

확인을 위해 1960년 이래의 분배상태의 변화를 보자. 아래 그림은 John Weeks의 UN/DESA working paper에서 전재한 것인데, 붉은 색 라인이 미국의 Gini 계수로, 197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상승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Source: UN/DESA Working Paper 

5. 평가?

GGKS의 분석은 굉장히 흥미로운 시도임에 분명한 것같고, 한국에서도 누군가가 했으면 좋겠고, 다만 아직 확증이라기보다는 여러 전문가들이 달려들어서 논쟁과 개선작업이 꽤 진행될 것 같은 느낌. 예컨데 끼리끼리 결혼지수도 모두가 동의하는 단일한 것이 아닌 듯. 아래 그림을 보면, 이들의 AEA Papers and Proceedings 발표 논문에는 tau 외에도 delta와 gamma 지수가 등장하는데, 이들도 모두 끼리끼리 결혼지수. 그런데 이들 지수는 1960년 이래로 단조증가. 그렇다면 1980~2005년 기간에 어떤 지수를 쓰느냐에 따라서 끼리끼리 결혼하는 정도가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한다는 뜻. (아마 이런 이유로 지수별 차이가 없는 1960/2005년 비교를 한 것일 듯)

Source: AEA Papers and Proceedings Figure 1. The rise in assortative mating, 1960-2005
그나저나, 직감으로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까? 확실히 끼리끼리 결혼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는 듯한데. 고시패스(이건 합격이 아니고 "패스"라고 해야 어감이 산다)를 한 변호사가 뒷바라지 해준 하숙집 딸과 결혼하는 그런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데......

2014년 2월 19일 수요일

US Infant Mortality and the President’s Party

미국의 영아사망율이 공화당 집권기와 민주당 집권기에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실증 분석. 이 연구가 얼마나 잘 수행된 것인지 판단할 능력은 없고, 그냥 흥미로워서 메모. 혹시 황승식 교수같은 분이 코멘트 해주시면 감사.

Rodriguez, Javier M., John Bound and Arline T Geronimus, "US Infant Mortality and the President’s Party," in International Journal of Epidemiology, First published online: December 30, 2013.

1. 영아 사망율 추세

아래 첫번째 그림은 영아사망율의 로그값을 시기별로 그린 것이다. 분명한 것은 첫째 영아사망율의 뚜렷한 추세하락이다. 천명당 사망이 1965년  24.7명에서 2010년 6.1명으로 75%나 하락했다. 그리고 두번째로 뚜렷한 것은 흑백간에 영아사망율의 현격한 격차, 이것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 패스. 그림의 두번째와 세번째는 각각 신생아사망율과 신생아이후사망율로 영아사망율을 세분해 본 것인데 모두 동일한 패턴.



2. 공화당 정부와 민주당 정부의 비교

오늘의 문제는 위 차트에서 검은색은 민주당대통령 시기이고, 하얀색은 공화당대통령 시기인데,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있을까라는 것. 이것은 그림으로 뚜렷해 보이지 않지만, 추세를 제거하고 변동만을 남기면 눈에 쉽게 들어온다. 이것이 아래 그림.



이 그림을 보면 대체로 검은색 포인트가 0 아래에, 하얀색 포인트가 0 위에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인종의 영아사망율의 경우 공화당 정부에서는 추세선보다 2% 위이고, 민주당 정부에서는 1% 아래. 이것은 흑인과 백인으로 구분해도, 신생아사망율과 신생아이후사망율로 구분해도 모두 유사한 패턴.

3. 해석

하나의 해석은 공화당 정부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소득불평등의 확대가 건강불평등의 확대를 수반한다는 것. 물론 이에 대해서 반론도 만만치 않겠지만, 일단 여기까지.

그리고 상관이 인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서, 당연히 함부로 예단하지는 말아야 하겠지만, 또  이 말을 너무 남발해서, 의미있(어 보이)는 패턴에 대해 그냥 불가지론으로 몰아가는 것도 피해야....

PS> 위의 모든 차트는 이 글이 인용하고 있는 IJE 논문에서 전재.













2014년 2월 8일 토요일

기름유출 사고와 기업의 이미지 광고

사고로 환경을 파괴한 기업에 대해서, 법적 처벌 외에 소비자가 외면함으로써 응징을 할까? 한단면 어느정도나 할까? 이 기업이 사고전에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면 소비자의 처벌은 약해질까? 다들 주장은 많이 할 수 있으나, 계측하기도 입증하기도 어려운 주제.

2010년 4월 BP의 멕시코만 유정이 폭발하여 대량의 기름이 유출되었던 사고가 발생했는데, 세명의 경제학자가 이 사례에 대한 분석을 시도: Lint Barrage, Eric Chyn and Justine Hastings (January 2014), "Advertising, Reputation, and Environmental Stewardship: Evidence from the BP Oil Spill," NBER Working Paper No. 19838.

1. 소비자의 응징

사고기간 동안 BP 주유소는 다른 주유소에 비해 판매가격은 갤런당 4.2센트, 판매량은 3.6% 하락하였다. 마진도 주유업계 표준에 비해 25% 하락하였다 (모두 경제적으로도 통계학적으로도 유의).

아래 그림은 사고발생 이전에 BP 주유소의 평균 가격이 다른 주유소의 평균가격보다 상대적으로 높았다가, 사고발생 이후 반전되었고, 이것이 사고수습 (2010년 9월) 이후 다시 재반전 되는 것을 보여준다.


2. 응징의 기간

이러한 소비자의 응징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림에서 파란색 라인은 소비자들이 이 사고에 관심을 두는 정도를 표시한다. 구글에서 검색어 oil spill이 등장하는 빈도를 2010년 1월에 대비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예컨데 2010년 6월 경의 값이 50인데, 1월에 비해 50배 정도 검색이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은 9월 유출을 봉쇄한 이후 정상 수준으로 돌아간다.

두 그리에서 빨간 색 마크는 각각 BP의 상대적 가격하락과 상대적 판매량 하락을 보여주는데, 가격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때는 관심이 폭발한 것과 약간의 시차를 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쨋든 가격은 사고의 수습과 더불어 정상적인 수준으로 돌아온다 (1번의 그림과 정합적). 반면에 판매량은 사고수습과 관심의 정상수준 복귀에도 불구하고, 사고이전 수준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은 사고수습 및 가격정상화 이후에도 마진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3. 이미지광고의 응징강도 약화 효과

BP는 이 사고 이전에 정유업계에서는 이례적이라 할 정도록 대규모 친환경 이미지 광고를 수행하였다 (Beyond Petrolume Campaign). 이를 통해서 많은 광고상도 수상했고, 기업이미지도 매우 좋아진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캠페인이 사고에 대한 소비자의 응징에 영향을 미쳤을까? 이들은 BP의 친환경 광고가 많이 방송된 지역과 적게 방송된 지역을 구분해서 이 효과를 살펴보았다.


위 그림에서 검은색은 광고를 많이 한 지역이고 붉은색은 적게 한 지역이다. 두 지역의 사고 발생 전과 후 기간에 걸친 점유율계수를 보면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두 광고지역의 선택은 랜덤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BP가 내부 기준에 따라 선택한 것일테니 좀 유의할 것이 있을 터, 이들은 광고량 이외에 소득, 친환경정도 (녹색당 기부금 친환경단체 가입율 등) 등의 변수를 통제한 후에도 광고비 효과는 분명하였다.

추가적인 변수에 대해서는 예상대로 친환경정도가 높을수록 응징의 강도는 컸으나, 소득이 높을수록 응징의 강도는 약했다. 그런데 소득이 높을수록 친환경정도가 높아서 두 변수는 서로 중화.

여하튼 기업의 이미지 광고가 사고후 보험의 역할을 수행한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점에서 흥미롭다.

4. 소감

분석의 내용 자체가 흥미롭다. (악덕기업에 대한 소비자의 응징, 이 응징이 초래하는 가격/판매량/마진의 양적 효과, 응징 기간, 이미지광고의 응징 중화 효과)

그리고 정말로 다양한 데이터를 활용하는구나 하는 생각. 우리도 정부에서 휘발유값을 잡겠다고 몇년전부터 주유소별 가격정보를 인터넷으로 지도와 함께 제공하고 있는데, 뭐가될지는 모르겠으나, 충분히 의미있는 다양한 분석을 시도해볼 수 있을텐데...하는 아쉬움도 살짝.

그리고 기업 이미지 광고. 아마 두가지 반응 아닐까? 첫번째는 악덕기업이 광고를 통해서 이미지를 세탁하는 것의 효과라는 측면에서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두번째는 이미지 광고가 순전히 광고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정도는 그 이미지에 맞도록 실체를 바꾸려는 노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므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두가지 측면이 다 있는 것.... 이미지광고가 더 많이 하도록 하는 푸쉬와 광고에만 그치지 않도록 하는 경각심이 모두 필요.

2014년 2월 2일 일요일

노후 책임의 주체

며칠전 Pew Research Center에서 발표한 Attitude about Aging: A Global Perspective 중 하나의 차트가 내 페친들의 담벼락 여기저기에 등장했는데, 어 이건 나도 좀 당황스러운....

노후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질문에, 한국인의 경우 노인본인으로 응답한 비율이 53%로, 비교 대상국 중 가장 높았고, 가족이라고 대답한 비율은 10%로 아주 낮은편. 그리고 정부라고 대답한 비율은 33%.


다른 건 몰라도 "효"를 엄청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관념에 비추어 충격적이라고 할만. 아래는 서울시가 2013년 2월에 발표한 ‘서울 보건·복지의 주요변화 및 시민의식 분석현황’을 한국경제신문이 보도한 것인데, 질문 형식이 달라서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쨋든 Pew와는 크게 다르다. 이 질문은 본인/가족/정부 중 누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좀 복잡한데, 아래에서 가족전담을 가족이 가장 크게 책임진다로, 스스로해결을 본인이 가장 크게 책임진다로 해석하면 가족이 본인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 설문답면자가 가족전담을 본인+가족으로 해석했다고 하더라도, 단순 무식하게 28.7-13.6=15.1로 계산해도 본인보다는 가족의 책임을 더 크게 반응한 것.


다음으로, Pew의 결과에서 정부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항목을 보면, 한국은 33%로 상대적으로는 낮은 편 (21개국 중 낮은 순 5위). 보고서에는 "정부의 책임을 가장 높게 본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본인이나 가족의 책임을 가장 높게 본 사람들에 비해서 노년의 생활수준에 대해서 불안감이 큰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건 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고 (잘 되면 자기탓, 못되면 조상탓 정부탓).

개인에 관한 데이터는 없지만, 국가별로 노년에 대한 안심감을 조사한 것은 제시하고 있는데, 한국은 대체로 중간 수준.


그러면, 이 둘을 결합해서 보는 것이 의미있을까? 미래에 대해 안심하고 있는 인구가 많은 국가일수록 정부의 책임을 낮게 보는 그런 경향. 그래서 이 둘을 결합해서 그려본 것이 아래 그림인데 우하향하긴 하지만 피팅이 잘 안되네....(y = 0.572985 - 0.298005 x, R-Squared = 0.175819).


굳이 얘기하자면, 한국은 미래에 대해 불안한 인구는 많은 것을 고려하면, 정부의 책임을 꼽는 인구의 비율은 매우 낮은 편이라고....해도 될라나 모르겠네......

2014년 2월 1일 토요일

ABI, KKR, AEP, OB and Magic Numbers

기업 인수 시장에서 최근 매우 이색적이었던 것은 OB 맥주 거래, 이것은 생각할 거리도 많고 걱정할 것도 많고, 메모.

우선 이거래가 매우 특이한 것은, Anheuser-Busch InBev (ABI) 입장에서 보면 싸게 팔고 비싸게 되산 것. 최근 Economist는 이에 대해서 두건의 기사를 포스팅 (Here’s to payday and Another round of beer bonuses).

2009년 ABI는 사모펀드 Kohlberg Kravis Roberts (KKR) 및 Affinity Equity Partners (AEP)에게 OB맥주를 $1.8bn에 매각하였는데, 4년여가 지난 얼마전 ABI는 KKR-AEP로부터 OB맥주를 $5.8bn에 되사기로 하였다. KKR-AEP는 최초 투자금액의 절반정도는 차입금으로 조달하였고, 이에 대한 원리금을 열심히 배당으로 갚아나가고 있어서, 정말 짧은 기간에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다.

특이한 것은 오히려 ABI의 처지. 당시 부채비율이 높아 이를 낮추기 위해 경영진에게 특단의 인센티브를 제시하였고, 경영진은 OB맥주를 매각함으로써 막대한 보너스를 얻었다. 삐딱한 시각으로 보자면, "ABI는 OB맥주라는 자산을 담보로 어마어마한 이자율로 빚을 내고, 이제 천문학적인 이자를 붙여서 상환한 것, 그리고 그 와중에 이것을 잘했다고 경영자에게 보너스까지 준 것"이다. 어쨋든 이것은 뭐 흥미롭긴 하지만 남의 일이고.

정작 문제는 세금인데, 답이 잘 안보인다. KKR-AEP의 OB맥주 인수와 그 후속 배당과 관련된 과세에 대해서는 내가 블로그에 정리한 바 있다.


배동소득 측면은, OB맥주가 몰트홀딩에 배당한 것과 관련해서 몰트홀딩이 도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외국기업(Silenus Holdings)의 국내원천소득으로 간주해서 과세 시도하여 법원에서 다투고 있는 중인데 이것도 어렵겠지만, 양도소득도 과세하기가 쉽지 않을 듯.

아마도 ABI와의 거래는 Silenus Holdings라는 네널란드 소재 페이퍼컴퍼니가 몰트홀딩스를 ABI에게 양도하는 형식이 될텐데, 한국-네덜란드 이중과세방지협정이 있어서 쉽게 과세할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번에는 Silenus Holdings를 도관회사로 보고 그 배후에 있는 KKR/AEP 등이 실제 Beneficiary인 것으로 주장해서 과세를 해야할 텐데, 쉽지 않은 길.

패배주의에 빠져서는 안되겠으나, 국제조세는 들여다 볼수록, 일국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의 한계가 너무 크다는 생각. 국제적인 공조가 절실한 분야. ICIJ 등의 본격적인 탐사보도 등으로 국제무대(OECD, G20 등)에서 규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

Google, Motorola and Magic Numbers

최근 이루어진 Google의 Motorola 매각관련 단상.

거래는 매우 심플하다. Google은 2011년에 Motorola를 $12.5bn에 사들였는데, 며칠전 이를 Lenovo에 $2.91bn에 매각. 그전에 Motorola의 set-top box 사업부분을 Arris에게 $2.3bn에, 일부공장을 Flextronics에게 $75m에 매각한 것까지 고려하면, 매각으로 회수한 총 금액은$5.285bn (=$2.91bn+$2.375bn)으로 그 차액은, $7.215bn 손실.


막대한 손실인데, 이러한 비용으로 Google이 획득한 것은 1만건이 넘는 특허 (이 특허는 Lenovo에 매각한 것에 불포함). 이 특허의 가치와 위의 손실을 비교한 것이 대개의 보도인데, Forbes의 Google Profits Billions With Motorola Sale To Lenovo, Keeps Patents 기사는 조금 더 나갔다. Motorola 인수시점에  Motorola사가 갖고 있던 현금($3.2bn)과 이연법인세자산($2.3bn)만큼 지불한 비용에서 차감하여여 한다는 것, 이렇게 하면 최종적인 손실은 $1.615bn으로 줄어든다.


거래의 세부사항은 보도가 되지 않아서 내가 오해한 것일지 모르겠으나, 일단 거래시점에 Motorola가 보유하고 있던 현금은 고려대상이 될 수가 없다. 이 현금이 얼마였든, 그 후에 늘어났든, 줄어들었든 그것이 Google에게 배당등으로 이전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난센스인듯. 만약에 Google이 Motorola를 합병을 했고, 이번 Motorola 사업부분 매각에 보유현금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말이 되겠지만, 모토롤라는 구글이 인수한 후에도 별도법인으로 존재하였다.

다음으로 이연법인세자산. Motorola의 과거 결손금 등으로 인수 이전 또는 인수과정에서 이연법인세자산이 인식되었고, 그 후 Google이 연결납세(Consolidated Tax Return)를 통해 해당 이연법인세자산만큼 법인세비용이 절감되었다면, 이것은 수긍할 만.

요약하자면,  직접적인 사업 양수도 거래에서 오고간 금액차이 $7.215bn 외에 구글이 모토롤라에 추가적으로 투자 또는 지원한 금액, 모토롤라로부터 수취한 배당 등의 이득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을텐데 그것이 얼마인지는 애매한 듯. 좌우간 애초에 Google이 Motorola를 인수한 가장 큰 이유가 특허때문이었고, 거래가 최종적으로 종결된 현재 특허는 보유하게 되었으니, 그 댓가로 지불한 것이 적절한 것인가는, Who knows?

그냥 떠오르는 것이 LG전자가 Zenith를 인수했던 것. 나는 잠시나마 그 거래의 후폭풍의 일부를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는데, 인수 후 몇년만에 최종적으로 Zenith의 순자산은 전액 손상처리되었었다. 한국 기업에 의한 외국기업 인수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회자되었었는데, 한참 후에 Zenith 보유 특허로 로열티 수입이 엄청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최종적으로 이 거래가 그래서 이익이었는지 손해였는지 내가 판단할 처지는 아니나, 특허료수입이 손실을 만회할만큼이었을까 싶다.